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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Dec 08. 2020

<죽은 시인의 사회> (1989)

Seize the day!

#20201029 #죽은시인의사회 #닐과아버지 #양육태도 #방어기제



 왜 이 멋진 영화를 이제야 제대로 봤을까!


 유명한 영화다. Carpe diem, seize the day / Oh captain, my captain 등의 문장들. 특히 영화 마지막에 학생들 몇몇이 책상 위로 올라가 “Oh captain, my captain” 하는 장면은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그게 특히 잘난 형 때문에 주눅 들어 있고,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토드 앤더슨이 가장 먼저 책상 위로 올라갔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책상 위에 올라간 학생들과 고개 숙이고 외면한 학생들의 대비. 웰튼 같은 딱딱한 곳에서 이 정도의 변화면 큰 변화가 아니었을까.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영화를 크게 가로지르는 축인 닐과 닐의 아버지에 대한 인물 묘사였다. 영화의 첫 장면인 입학식 이후 교장선생이 강당을 빠져나가는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인사하는데, 닐은 교장선생이 눈여겨보는 우수한 학생으로 표현된다. 다음 장면인 기숙사에서 닐은 친구들이 찾아와 스터디할 거냐며 묻는 인싸 of 인싸로, 친구들이 따르고 졸업 연감 부편집장까지 하는 엄친아이지만, 아버지 말에는 꼼짝달싹 못 하는 착한 아들로 묘사된다. 닐의 아버지는 ‘다 너 잘되라는 거야’라는 식으로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려 한다. Baumrind의 양육 태도로 따지면 Authoritarian;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다.

닐은 그저 죄송하다고 할 뿐.


 그런 닐은 키팅 선생이 바라던 대로, 자신의 day를 seize 할 수 있는 방법을, 하고 싶은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연극이었다. 그는 연극을 하기 위해 아버지 몰래 오디션도 보고, 허락한다는 편지도 (허위로) 작성하고, 주인공 배역도 따낸다.


꿈을 찾은 사람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라!


 결국 닐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연극을 그만두라고 한다. 닐은 키팅 선생에게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묻지만, 선생은 닐에게 ‘아버지에게 네 열정을 얘기해보라’라고 한다. (사실, 자신이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지) 다음날, 닐은 키팅 선생에게 ‘아버지에게 얘기했다’라고 했지만, 아마 거짓말이었을 테고, 닐의 아버지는 극장에 찾아와 아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눈빛조차 싸늘해 보인다. 자신의 말을 거역했다는 분노가 더 컸을까.


 닐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감동하여 연극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여느 성장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박수받는 상황에서도, 아들을 위한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불안 때문이었을까, 닐의 아버지는 닐을 데리고 집에 와서 웰튼에서 자퇴하고 육군사관학교로 가라고 한다. 닐은 자기 생각이 뭔지 말하려고 하나, 여전히 강압적인 아버지 앞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방어기제인 억압(repression)을 보인다. (닐은 아버지가 부편집장을 그만하라고 할 때도, 연극을 그만하라고 할 때도,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냥 “Nothing”)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보이는 씁쓸한 미소를 아버지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알아차릴 아버지였다면 사태가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겠지.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닐의 어머니가 나오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닐을 다독이며 방을 나간다.

"Nothing"


 닐은 옷을 벗고 연극할 때 썼던 나뭇가지 왕관을 쓴다. 사실 연극 마지막의 내레이션은 연극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닌, 닐이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거다. 꾸짖지 말아 달라고. 용서해달라고.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제멋대로 하려는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자신의 계획 아래에 두려고 했지. 닐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결국 죽음을 택한다. 감정이 고조되는 가운데에, 굳이 아버지가 침실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두는 것을 클로즈업한 장면을 넣은 건 닐의 아버지의 강박적인 성격을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식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투사; projection?)


 이후 영화 내용은 아시는 바대로다. 웰튼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싶다’라는 키팅 선생의 바람은 너무 컸던 게지.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열정을 피워내고 싶었던 키팅 선생




 웰튼에는 키팅이라는 큰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이 지나면서 아이들 마음에는 자유와 희망, 꿈들이 꿈틀거렸지만 닐이라는 친구도, 찰리(누완다)도 잃었다. 배신자가 생겼고, 아이들은 상처받았지. 하지만 난 닐이 죽음으로써 오히려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야지. 그러지 못하는, 아버지의 트로피 같은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누구나 ‘seize the day’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주어지는 ‘시간’을 어떤 식으로 쓰느냐는 스스로의 몫이다. 그게 닐의 아버지처럼 어떤 책임감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닐처럼 아버지 몰래 자신이 하고 싶은 연극을 하면서 보낼 수도 있다. 양아치처럼 묘사된 ‘누완다’도 그렇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토드도 그렇다. 자신 있게 사랑을 밀어붙이던 녹스 오버스트리트 또한 그렇다(개인적으로 배려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원래 살던 방식대로의 삶을 택한 카메론도 탓할 게 없는 이유다.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면 된다. 사람은 모두가 저마다의 길 위에서, 저마다의 성장을 하는 존재니까. 다만 누구나 겪는 그 성장 과정에서 너무 크게는 다치지 않았으면, H. Kohut의 용어대로, '적절한 좌절'을 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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