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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발톱과 경계

pluripotent, pseudo-pluripotent

by 초이

#20250730 #경계 #한계


나는 양 새끼발톱에 며느리발톱이 있다. 평소에는 신경 안 쓰고 지내는데, 길어지면 양말이나 슬리퍼를 신을 때 간혹 걸린다. 그럴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발가락 자체가 젖혀진 것처럼 놀라고 아프기도 하다. 발톱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부딪혀서 자신의 경계를 다시 알게 된 셈이다. 그러면 나는 발톱을 자를 때가 된 것을 알고 발톱을 깎는다.


발톱만 그럴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사람이나 상황)에 부딪혀야 자신의 경계를 알 수 있다. 그래야 그런 자신을 감내하기로 마음먹든가 고치든가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면 경계가 모호해서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다. 부딪혀보지도 않고 자신을 애매한 채로, 가능성만을 남겨두는 사람들. 몇 해 전 KBS [무엇이든 물어보살]에도 이런 사람이 나왔고, 유튜브 댓글이 촌철살인이라 캡처해 뒀다*.

1264. 물어보살, 무명배우, 가능성만 남겨 놓는 삶.png


이런 상태를 내 멋대로 ‘pseudo-pluripotent’라고 이름 붙여봤다. pluripotent는 줄기세포(stem cell)의 특성을 얘기할 때 배운 단어인데,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정도로 이해했다. 접두사 pseudo-는 ‘가짜의’, ‘모조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pseudo-pluripotent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닌’ 정도의 뜻이 된다. 자신이 다재다능하고 뭐든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즉, pseudo-pluripotent는 경계가 있지만 어디까지인지 확실하게 몰라서 자신을 우주와 동일시; 자신이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가 드러나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원래부터 분리되어 있었지만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던) 우주와 분리되면서, 자신이 (생각과는 다르게) 전지전능하지 않음을 알고 좌절하게 된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전지전능함이 아니다.


반면 진짜 pluripotent는 ‘나’라는 경계를 다 알아서 모두 놓아버린 상태다. 우주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서 우주랑 하나가 된 상태. 실제로 전지전능하며,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아서 자유롭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우주 또한 근본적인 윤회는 벗어날 수 없다.

1595. pluripotent vs pseudo-2.jpg 왼쪽은 자신도 모르는 경계, 한계가 있다. 오른쪽은 (우주 내에서는) 한계가 없다. 무궁무진하다.


자신의 경계를 알아가는 과정이 편하지는 않다. 며느리발톱이 어딘가에 걸렸을 때 두근두근한 것처럼 자신의 경계가 드러나는 순간도 놀랍고 괴롭고 불쾌하다. 가만히 있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내 한계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부딪혀서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더 자유로운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2020.07.27., KBS Joy, 무명배우의 가슴 짠한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팩폭으로 다스리는 선녀보살ㄷㄷ [무엇이든 물어보살]

https://www.youtube.com/watch?v=gYErpoXUO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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