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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아공(我空)

by 초이

#20241214 #나


더 깊어지기 전에 인연(因緣)을 알아볼 수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마음이 아주 맑은 사람이 아니면 인연은 알 수 없고, 중생들은 그냥 겪어야 하는 것을.


근데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드러나면_특히나 악연(惡緣)일 때_ 대처 방식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나’를 바꾸든, ‘환경’을 바꾸든. ‘나’를 바꾼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생각/마음을 바꾸는 것이고, ‘환경’을 바꾸는 것은 주어진 상황이나 장소 등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불교에서는 환경을 바꾸라고는 잘 안 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본인이 지어놓은 것들을 돌려받는다고 하니까(自作自受, 自業自得). 자기가 지어놓은 건 결국 언젠가는 다 받아야 할 텐데. 언젠가 다 받을 거면 그냥 이번 생에 다 받아서 깔끔하게 털 수 있다면(빚을 청산하듯이)? 혹시 가능하다면 그냥 터는 걸 넘어서 더 좋게 만들고 간다면 본인한테는 더 좋은 일이 아닌가? 근데 애초에 윤회나 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면 소용없겠지.


(인연(因緣)이 깊은 관계에서는 선도 악도 아닌 관계가 되긴 힘들겠지? 아무래도 얽히고설킨 게 많다는 건 좋은 게, 혹은 나쁜 게 많이 있는 관계일 테니까)


혹시 불교를,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기억도 못 하는) 자신이 벌여놓은 걸 돌려받는 거라는 것을, 지금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인연이 (또 기억도 못 하는) 다음에 또 이렇게 만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은 덜 원망스럽고, 주어진 현실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줬을까?


그동안 ‘나’가 없었다고,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고집하는 그 ‘나’는 무엇인가? 그 ‘나’도 영원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해서, 추구하고 원하고 집착할 대상이 아닌데. 그 ‘나’도 몸도 생각도 마음도 계속 변하고,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는데. 그들은 찰나마다 변하는 그 ‘나’들 중에 어느 ‘나’에 매여서 집착하고, 그렇게 되지 못해서 상대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내는 걸까? 근데 나도 잘 안 된다. 참 안타깝다.


부처님께서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설하시면서, 중생들이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다섯 가지 요소가 쌓인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오온五蘊; 색色-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진 드러난 형체, 수受-감각 작용, 상想-지각하고 의식하는 작용, 행行-의도하고 지향하는 의지 작용, 식識-의식하고 분별하는 작용) 또,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空)한 것을 알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다고 했다. 오온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으로 영원할 수 없고 계속 변한다. ‘나’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붙잡는데 변할 수밖에 없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디에 매여있는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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