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어쩔 수가 없나?
#20251224 #어쩔수가없다 #집착
어쩔 수가 없다.
집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
직업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
...
결국은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
주인공 만수는 영화 첫 장면부터 자기 집 마당에서 가족들을 끌어안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다. 세상은 그런 만수에게서 하나씩 빼앗아간다. 직장부터 시작해서 집, 가족(개), 댄스, 아내의 취미(테니스), 아들의 넷플릭스와 딸의 첼로 레슨까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영화는 만수가 직장을, 그리고 모든 것을 되찾는 과정이다. 자신이 채용되기 위해 자기보다 스펙이 좋은 사람들을 찾아서 죽인다는 발상이 묘하다. ‘오죽하면 그랬겠나?’ 하면 또 어쩔 수가 없고. 다행히도 영화는 새드 엔딩이 아니라서 다시 다 돌려주기는 한다. 과정이 좀 기괴하긴 하지만.
만수는 자신의 라이벌들을 죽이려고 한다. 근데 만수는 총 방아쇠도 제대로 못 당길 만큼 어수룩하고, 누굴 죽일 만한 위인이 못 된다. 라이벌들도 종이밖에 모르고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만수의 살인에 더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은 종이 때문에 쉽게 돈 벌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을 거부한다. 종이 회사에 다시 취직하려고 술도 끊는다. 한 사람은 딸바보인 데다가 어쩔 수 없이 생활을 위해 구두를 팔고. 마지막 한 사람은 ... 그래도 죽을 만큼 잘못하지는 않지 않았나?
어쨌거나 만수는 계획을 성공시키고 라이벌을 다 제거한다. 회사에도 다시 취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수가 다시 다 얻었나? 다 얻었지. 근데 잃은 것도 있고, 오히려 더 얻은 것도 있고. 직장은 다시 얻었지만, 동료들은 잃었고(로봇이 대신함), 평생 자신의 살인에 대해 들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은 얻었다. 콕콕 양심도 찔리고. 살인을 함께 감수하기로 한 만수 와이프의 양심도 덩달아서 찔리고.
영화가 불편한 건 만수한테 어쩔 수가 없는 상황만을 모아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삶이란 게 어쩔 수가 없기만 하던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건 없나? 만수가 욕심을 놓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살아야 한다. 태어났으니 당연히 ‘살아야 한다.’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입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빼앗거나 밟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잡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라면 이런 점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물을 사냥해서 잡아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가죽이 없으면 얼어 죽는다. 다른 부족에게서 동굴을 빼앗지 않으면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얼어 죽는다.
현대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잡고 죽인 고기나 생선이나 쌀을 먹고, 누군가가 만든 옷을 입고, 집에 산다. 좋은 학교, 회사에 가려면, 승진하려면, 하다못해 좋은 공연을 보려고 해도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쟁취해야 한다. ‘내가, 우리가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내가 살기 위한’ 선택들이 오히려 생사(生死)의 길로 빠져들게 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생(生)을 위한 선택이 오히려 생사(生死)의 길로 빠져들게 한다. ‘나’,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만을 위하게 되고, 더욱더 내 것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산다’라는 명제에는 ‘나’도 있고, ‘사는 것’도 있다. 만일 ‘나’도 없고, ‘산다’는 것도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중생(衆生)들이 유병(有病)에 걸려있다고 하셨다. ‘있다’라는 생각에 갇혀서 진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변하는 것들을 갖고 ‘있다’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것들은 부처님 안목에서는 다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께서 ‘있다’라고 하시는 거는 변하지 않는 것, 영원불멸, 불생불멸한 것, 진리의 자리, 우주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에 애착을 갖고 집착하는 것이다. 몸도 태어나면 자라고 병들고 죽고, 갖은 풍파를 겪으며 마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사회에서의 지위도 변하고, 가진 재산도 변하고, 똑똑해지기도 하고, 멍청해지기도 하고, 기분도 변하고, 명예도 변하고, 영원할 것 같던 관계도 한순간에 남남이 되기도 하고.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것에도 머무를 수 없고 다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변하는 것들을 붙잡고 산다. 왜? 살아야 하니까. 부처님 안목에서는 다 없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안목에서는 여실하게 있는 것들이다. 살려면 건강해야 하고, 사지도 멀쩡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집도, 직업도 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다 ‘없다’고 하셨지만,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신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잘살려고 노력하되, 다 변하기 때문에 애착,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 다섯 가지 힘, 오력(五力)을 기르라고 하셨다. 내가 배운 오력은 재력(財力)·체력(體力)·미력(美力)·학력(學力)·권력(權力)이다. 이 다섯 가지의 힘도 세상을 (편하게) 살기 위해 필요하지만, 다 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 큰 힘을 갖도록 노력하되, 그 힘 자체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을 잘 사는 것에 매몰되면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변하는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지, 여기에서 잘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만수는 진짜로 어쩔 수가 없었나? 만수가 집에 대한 집착만 놓았다면, 가족(개)에 대한 집착을 놓았다면, 취미생활에 대한만 집착을 놓았다면? 되찾으려고 노력은 해야겠지만, 그게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살인을 하면서까지 해야 했을 것인가? 되찾아도 언젠가는 또다시 내 손을 떠날 것들인데?
이 세상은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부처님께서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적용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남에게 베푼/빼앗은 것은 똑같이 되돌려받는다고 하셨다. 지금은 어물쩍 안 걸리고 잘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다음에는 어쩌려고? 다 한순간만 보고, 한 생만 잘 살면 땡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생이 끝나면 다음 생은 어쩌려고?
이번 생만 잘 살려니까 ‘어쩔 수가 없지.’ 다음 생이 있고, 자신이 행한 그대로 돌려받는다는 걸 안다면 타인을 위하는 행동이 오히려 ‘어쩔 수 없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이 진짜로 ‘다 이룬’ 것인가? 내가 바라던 것을 다 가지면 그땐 다 이룬 것인가? 가진 것은 변하지 않는가? 바라던 것은 변하지 않는가? 더 많은 걸 바라게 되지 않는가? 돈은 가질수록 더 많이 가졌으면 하고, 집도 더 컸으면 좋겠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하다가 점점 클수록 착했으면,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면, 예의가 발랐으면, 공부도 잘했으면 하고 더 많은 걸 바라게 되지 않나? 무엇이 진짜로 다 이룬 것인가? 이 세상에서는 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여실히 깨닫는 것이 진정으로 이룬 것이 아닌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세상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다 끊어졌을 때,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을 때, 온 우주에 꽉 차서 움직일 필요도 없을 때가 진정으로 다 이룬 때가 아닌가?
나는 미장센은 잘 모르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가 있다. 세 번째 살인에서 만수가 끊었던 술을 마시고는 그전부터 시름시름 앓던 이를 펜치로 뽑아버리는 장면이다. ‘앓던 이가 빠지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만수는 직접 앓던 이를 뺐지만... 어쨌거나. 첫 번째 살인은 직접 한 것도 아니었고, 두 번째는 어설펐지만, 세 번째는 작정했다. 계획적으로 술을 먹이고 토하다가 죽은 것처럼 보이려고 간 고기도 가져가고. 치밀하고 과감하게. 만수가 이를 뽑는 장면은 최소한의 양심? 동료 의식?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