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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Nov 17. 2022

유복한 내 딸에게 없는 단 한 가지=할머니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_심윤경 에세이

엄격한 엄마 밑에서 자란 모범생 딸.

흔하고 평범한 조건 같지만, 저자에겐 할머니와 한 방을 썼다는 특이점(?)이 하나 더 있다.


정작 같은 방을 쓰는 할머니는 모든 대답을 단답으로 할 정도로 과묵했고, 저자가 극심하게(*저자의 표현의 따르면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생떼를 쓰는 순간에도


"예쁜 사람, 왜 그러나." 이 한마디뿐이었다고 한다.




사춘기를 맞이한 저자가 할머니랑 같은 방 쓰기 싫다고 울고 불며 방문을 걸어 잠겄을 때도, 그저 아무 말 없이 문 앞에 서있다 자리를 피했다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와 달리, 공부를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 채찍질하는 엄마와
그저 그런 엄마를 보고 매번 "에미 별나다"라고만 한마디 하고 마는 할머니.


그리고 그런 상반된 두 사람 밑에서 자란 저자 역시 훗날 딸아이의 엄마가 된다.


어린 나는 혼날 일이 많았다. 못해도 혼나도 잘해도 혼났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해서 더 잘 달리게 하는 것이 엄마의 확고한 교육관이었기 때문에 잘하면 잘할수록 혼나야 할 이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중략)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에미 별나서"라고 중얼거렸는데 어린 나는 별스럽지 않은 그 말에서 중요한 정보를 무의식에 저장했다. 내가 혼이 나는 이유는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엄마 성격이 유난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중략)

나 자신의 좌절에 겹친 꿀짱아의 사춘기를 넘기느라 날마다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 도서관의 심리학 서가와 육아서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할머니가 늘 하던 "에미 별나서"가 떠올랐고 어릴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의미를 찾아냈다. 할머니는 보이지 않게 나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있었던 거였다. 이것은 많은 불필요한 혼란을 건너뛸 수 있게 해 주었고 중요한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할머니에게 보이지 않게 양육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기른 것은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엄마였지만 정물이나 소품 같았던 할머니는 양육의 대가답게 최소한의 언어와 행동만으로도 만만찮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내가 자란 집에서는 두 명의 강력한 양육자가 전달하는 상반된 메시지가 두 개의 사랑으로 20년간 평행우주처럼 나란히 흘렀다. p.63~4


할머니는 그저 방관만 하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힘 있는 양육'을 하고 있었다는 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당시간이 흘러 본인이 엄마가 된 이후에 깨닫게 된다.


이전에 살았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였다. 모두 두 글자 이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 신기하도록 모두 한 글자였다. 아마 생명과 양육 활동이 그토록 근원적인 것임을 언어로서도 상징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거북했다. -p.34


문득 할머니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가슴이 미어질 듯 차오를 때가 있다. 그날, 꿀짱아가 도서관에서 김치볶음밥을 먹었던 날 그랬다. 나에게는 인심 좋게 장하다고 말해주던 따뜻한 할머니가 곁에 있었는데, 꿀짱아의 곁에는 없다. 대체로 내 딸이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한없이 열악하다. -p,161


초보 엄마로서 사춘기 딸을 상대하는 게 한 없이 힘든 일이지만,

어느 순간 무한정 베풀며 매번 장하다고 말해주었던 할머니가 내 딸에겐 없다는 걸 불현듯 깨닫는다. 더불어 그러한 존재의 부재가 엄청난 일임을 깨닫고 딸에게 한 없이 미안해진다.




어른이 되어 가면서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기쁜 만남이 실을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과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아예 미워하고 다투는 관계는 아닐지 몰라도, 모든 사랑이 축복 같고 봄 햇살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랑하지만 당황스러운, 사랑하지만 입장이 다른, 사랑하지만 부담스러운 그런 미묘한 지점들에 우리는 흔히 서 있고 우리의 만남은 대체로 어느 정도 조심스럽다. p212

사랑하지만 당황스럽고 입장이 다른. 우리의 모든 만남이 대체로 조심스럽다는 말에 굉장히 공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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