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뤄준 덕질
그렇게 좋아하던 연예인이랑 방송하면 어떤 기분인가요?
연예인은 늘 관심의 대상인지, 종종 강연을 하면 질의응답 시간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팬 관련 프로그램으로 입봉을 하고, 책을 내면서 나름 오래 잘 숨겨왔던 젝키의 은지원의 팬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젝키는 1997년 4월에 데뷔한 그룹이다.
그리고 그 시절 나의 팬심도 가장 뜨거웠다.
당시 콘서트 티켓 값이 3만 원이었는데,
초등학생에겐 너무나 큰돈이었다.
그럼에도 88 체육관에서 하는 콘서트에 너무 가고 싶어서, 단식 투쟁에 돌입했고
마음 약한 아빠는 '외국인같이 생긴 놈들(?)이 뭐 좋다고 저 난리냐'면서도 결국 3만 원을 주었고,
학교 조퇴하고 은지원의 사인회에 간다는 딸을 대신해 회사 근무 시간을 빼서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아주었다.
2000년 젝키의 해체와 함께 나의 유난스러운 덕질도 끝날 줄 알았는데,
뿔뿔히 흩어진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을 응원하러 다니느라 오히려 나의 덕질은 더 바빠졌다.
아빠도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셨는지, "어차피(?) 공부도 못하는 거 그냥 녹화 기사나 해라"라고 하셨다.
지금처럼 유튜브나 VOD, 다시 보기 시스템이 없던 당시에 오빠들을 두고두고 또 보기 위해 녹화 하나는 놓치지 않고 기가 막히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의 팬심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마 그 온도로 살았으면 내 수명은 확 줄었을 것이다.
내 감정이 100이라면 200 이상의 온갖 사력을 다하는 게 팬활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탈덕은 아니었다.
여전히 활약하고 있는 젝키, 그 중 최애였던 지원오빠의 활약을 바라보며
어디서든 무탈하길 내심 바라고, 응원했을 뿐이다.
그 시절의 뜨거운 온도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만나봤을 법도 한데,
긴 세월은 나의 유난스러운 팬심도 조금은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나 보다.
그렇게 연예인과 늘 함께하는 직업인 피디가 되고도 10년을 그야말로 코빼기도 못보다,
<살림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주 녹화를 하는 MC로 맞이하게 됐다.
사실 누구나 가까이서 보면 단점이 보이고, 아쉬움이 더 선명하게 남는 법이다.
타인에게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심 만나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너무나 열렬히 좋아했었기에 그 시절의 추억마저 망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기반한 본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6개월 여 매주 가까이서 피디와 엠씨로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중간 상황 보고.
다행히 나의 소중했던 추억은 깨지지 않았다.
젝키의 은지원이라는 사람은
내가 먼발치서 팬으로 바라보고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사려 깊은 모습이었다.
특히 출연자에게도 제작진에게도 그랬다.
몇 주전 녹화 때의 일이다.
녹화를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바로 안가고 쭈뼛거리더니 엄청 어색한 표정으로,
"은. 지. 피. 디. 님 그 자료 받았어요?"라고 물어봤다.
평소에 나를 부를 일도 딱히 없고 '은지피디님'이라고 부른 적은 더더욱 없었기에 다른 스태프들도 신기해하며 쳐다봤다. 평소에 자주 보는 제작진에게는 존대보다는 편하게 말하는 편인데
스태프들이 내 주변에 많아서 그런지 어색하게 웃으며 존댓말로 매니저 편에 보내준 자료를 편집에 썼는지 묻는 것이었다.
사실 나이도 한참 어리고 연차가 높은 오빠에겐 우리 부장님도 막내 조연출 때 본 동생 뻘이라 편하게 대화하는 편인데,
나름 스태프들 앞에서 메인 연출자인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름 고심해서 본인도 어색하지만 '은지피디님'이라는 호칭을 고르고 골라 써준 것이다.
오빠는 의외로 그런 사람이다.
훨씬 더 타인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고 앞서서 배려해 주는 사람.
예능에서는 앞뒤 없이 치받기도 하고, 대책 없이 우기는 모습이 주로 나오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모습도 있지만, 가까이서 일하는 제작진이 느끼는 모습은 누구보다 생각 많고 배려하는 사람이다.
익히 같이 일해본 이들에게서 들어왔지만,
내가 직접 겪기 전에는 팬이었던 나조차도 괜히 가까이서 지내면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지 않을까 하는 편견을 잔뜩 가지고 보기도 했었다.
팬의 마음은 묘한 것이어서, 식을 땐 무섭게 식고 때로는 파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애틋했던 그 마음이 폭력적으로 변질될까 봐 스스로 겁내기도 한다.
논리적으로는 좋아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고, 이상한 것일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11월 말에 시니어 팬덤의 심리적 특징에 대해서 얘기하는 자리가 있을 예정인데,
그 자료들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팬심과 지금의 마음이 떠올랐다.
최애 스타의 무탈함과 건재함에, 또한
꿈을 이뤄준 덕질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