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슐츠씨』_박상현 지음
최근 흥미롭게 읽고 있던 책 <친애하는 슐츠씨>.
책의 내용 중 중 '결핍의 덫(scarcity trap)'이라는 개념에 몰입되어서 꽤 오래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책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지만, 영리하고 학업성적이 뛰어나 장학금으로 명문대 입학이 확정적이었던 미국의 한 여고생이 등장한다.
반전은 그 영민하고 당찬 여고생이 입학을 하루아침에 포기한 채 그 누구도 모르게 잠적해 버린 사건으로 이 챕터는 시작된다.
본인의 능력도 충분하고, 주변의 지원도 확정적이었던 상황에서의 잠적.
심지어 아무도 찾지 못할 정도로 잠적해 버려서 사망 명단까지 뒤져야 하는 상황까지 가버린다.
“우리 애들이 좀 부족해”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렇게 역경을 이겨내고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인데 단순한 서류 작성에서 좌절한다고?’ 이를 설명하는 유명한 개념이 바로 ‘결핍의 덫(scarcity trap)’이다.
사람들은 돈이나 시간 등의 자원이 부족할 경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게 결핍의 덫 이론으로서 여러 경험을 통해 증명되기도 했다. 이 개념을 소개한 기사에는 작은 실수로 어처구니없이 해고당한 여성이 당장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신용카드로 물건을 급하게 대향 구입하고는 연체료를 납부하지 못하는 사연이 등장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지만 궁핍 상태에 처한 뇌는 그렇게 ‘조금만 더’ 생각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능의 문제도 게으름의 문제도 아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사람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해서 현재 상황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큰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
내면이 탄탄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한심한 이로 취급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 사람이 힘들게 대학에 합격했는데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등록금을 안내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꽤 큰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생각을 미세하지만 꽤 긴 시간 품고 있던 어제, 연출을 맡고 있는 <살림남>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녹화 전에 엠씨인 백지영 언니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책 얘기로 대화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는데, 언니가 먼저 '너무 쉽게 포기하는 이들'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어쩌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단 한 번도 제대로 본인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취 직전까지 밀고 나갈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이 한심하기보다 가장 안쓰럽고 딱한 사람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최근에 읽었던 <친애하는 슐츠씨>의 결핍의 덫 개념과 너무 유사한 내용이었다.
굳이 읽은 책을 뽐내기보단 언니 얘기를 더 듣고 싶어서 책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책에서도 설명했지만, 언니의 얘기를 들으니 더더욱 납득이 되었다.
"쟤는 왜 저렇게 한심할까, 생각이 없을까?"라고 쉽게 혐오하고 혀를 찼던 사람들 중에
'도저히 그럴 힘 조차 낼 수 없어 주저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요즘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런지,
행복한 우연의 일치가 잦아지고 있다.
<친애하는 슐츠씨>를 읽은 것도, 언니와의 녹화를 앞둔 스몰토크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며 교감할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게는 꽤 유의미한 우연의 일치다.
어제는 촬영 차 언니 집에 갔는데, 서재 딱 한가운데에 내 책 <덕후가 브랜드에게>가 꽂혀있는 걸 봤다.
어떻게 내 책도 꽂아두었냐며 호들갑 떨며 감동하니,
"야 그건 당연하지~ 하나 찍어가라"며 호탕하게 웃어준 언니.
작년 초 우연히 맡게 된 프로그램이지만 그 속에서 이어진 인연들에 나도 더 성숙하고 탄탄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 준 프로그램과 사람들에 더없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