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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재능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가 곧 인생

by 편은지 피디
주어진 재능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곧 인생이다.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문구다.

인생이란 '주어진 재능''어떻게 반응'하느냐라는 말.


일단 주어진 재능을 알아차리는 일부터가 쉽진 않다.

재능이라면 뭔가 걸출한 연주 실력이라거나 몇 초만에 여러 자릿수 암산을 해내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재능이라는 단어에는 사람을 괜히 초라하고 주눅 들게 만드는 교만한 힘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크게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공부도 그렇고, 몸 쓰는 체육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교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칭찬받았던 기억을 굳이 떠올리면,

아빠의 회사 전화번호를 외운 일과 밤늦도록 부업하는 엄마 옆에서 책을 읽었던 일 정도인 것 같다.


엄마는 남들 앞에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무언가 해내는 내 모습이 기특했던 건지

만원 버스에서 아빠 회사 전화번호나 다른 번호들을 외워보라고 시키곤 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칭찬에 대한 기쁨보다는 괜히 사람들이 쳐다보면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늘 무언가를 좋아해도 티 나지 않게 혼자 좋아하곤 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거나 적극적인 것이 오히려 부끄럽던 시절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어린이집에서부터 "불편해요.", "싫어요"하는 법부터 가르치지만 말이다.


불편함을 차라리 꾹꾹 참는 게 덜 창피하고 편했던 시절이니 더 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재능은 무엇이었을까.


어린시절을 떠올려 보면 말로 내뱉기보다 조용히 읽고 공상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사려 깊은 몇몇 선생님들이 글에 대해 칭찬해 주면서 조금씩 나는 변해갔다.


모자란 거였는지, 순수한 거였는지... 나는 일기장을 매번 선생님께 제출하면서도

일기는 나만 보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기장엔 정말 솔직한 마음을 쓰고 통일 전망대 같은 곳에 다녀와서 무언가 감성적인 변화가 생기면 날아가는 새 따위를 파스텔로 그림도 그리곤 했다.


심지어 가끔은 선생님의 미운 점도 과감히 쓸 정도의 솔직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안 가고 연예인을 보러 갔었는데, 바보같이 그것도 일기에 고스란히 적었고


그날로 엄마는 학교로 소환되었다.

일기장을 펼쳐두고 담인 선생님은 엄마한테 내 문제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셨다고 한다.


그날 엄청 혼났는지 기억은 구체적으로 나지 않는다.

오히려 맘 여린 엄마는 내가 어디선가 된통 깨진 것 같았을 때는 오히려 본인이 더 주눅 든 모습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이미 피가 철철 나는 어린 마음에 기름을 붓지 않으려는 어른의 마음이었을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너무 심하게 회복되지 않을 만큼 상처받진 않았나 눈치를 보는 듯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일기장 난동(?)은 그렇게 종료되고, 엄마에게는 글을 진심으로 쓰는 딸인 나만 남았다.


그래서 다들 국영수 학원에 다닐 때 한 여름에 기르던 앵무새가 추울까 에어컨조차 켜주지 않는 선생님이 계시는 자연친화적인 글짓기 학원에 보내주었다.


말이 학원이지 소설을 냈었다는(?) 중년의 여자 선생님이 지켜만 보실 뿐 2시간 동안 혼자 글을 쓰고 혼자 집에 오는 시스템이었다.


글을 쓰고 노트를 두고 나오면 며칠 뒤 투박한 몇 줄로 작가 선생님의 평이 쓰여있었다.


기억에 나는 평은 내 글이 숨 쉬는 흙과 같다는 평이었다.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해맑은 글들만 썼는지,

선생님은 다소 심오한 내 글에 유독 흥분하며 등단은 따놓은 당상이라며 수시로 문창과도 갈 수 있겠다며 엄마 앞에서 호들갑을 떨곤 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오히려, 성적도 꽤 올라가고 있던 시점이어서 문창과에 보내준다는 선생님 말에 엄청 실망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선언 후 얼마 안 되어서 그 학원은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나는 숨고 싶을 때도 그냥 숨 쉬고 싶을 때도 활자 안에 숨는 사람이 되었다.


그냥 읽을거리만 주면 그냥저냥 살 수 있고,

평생 하나만 할 수 있으면 그냥 읽고 쓰고 싶다.


천성이 게을러서 일 수도 있고 그런 천성조차 그냥 내가 타고난 기질일지도 모르겠다.


출판사 대표님과 책 진행을 할 때도 납기가 가장 쉬운 나에게

'글 공장'같다고도 하셨다. 주문을 넣으면 납기일에 맞춰서 출고되는 글 공장.


굉장히 수려한, 잘 쓰는 글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가장 오래 꾸준히 해온 일이며

처음으로 내 이름이 적힌 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일이자

늘 꾹 닫혀있었던 어린 시절 입을 트여준 일이기에 애정이 가는 것은 당연한 처사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것에 늘 감사하며 기꺼이 반응하며 사는 게

앞으로의 내 인생일 거라 어렴풋하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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