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당직실에서 책을 읽던 어느 날. 중환자 병동에서 환자가 위급하다는 전화가 왔다.
“선생님, 환자분 혈압과 맥박이 떨어져요. 호흡수도 10 이하로 나오고요.”
전화를 받고 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환자는 심정지로 향하고 있었는데 DNR로 등록된 사람은 아니었다. 즉 연명의료 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에, 의료진이 적극적인 처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적극적인 처치라고 해봤자 동네 요양병원 수준에서,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소생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약 30분간 가슴 압박을 시행하면서 중간중간 에피네프린을 주사하고, 리듬 분석을 시행했다. 그러나 환자의 심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의 심폐소생술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 심폐소생술을 중지했다. 환자의 동공과 심장, 호흡을 확인했다. 동공반사도, 심장박동도, 자발호흡도 없었다. 사망선고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문득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기 전이나 하는 중에, 다른 의료진이 가슴 압박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지금 환자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해서 심폐소생술을 할 예정이고,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보호자께서도 가능하면 빠르게 병원으로 내원해 주세요.” 같은 말을 전하곤 했다.
하지만 이 환자의 의무기록지에는 어떠한 보호자의 연락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메모를 적어두는 칸에 사회복지사의 연락처는 있었지만, 사회복지사는 엄연히 ‘보호자’의 범주엔 들지 않았다. 연락을 할 수 없으니 일단 심폐소생술에 집중했고, 환자가 사망한 후에야 그 생각이 난 것이다. 여러 번 환자의 임종을 마주했으나 이 사람처럼 보호자가 아예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생각 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이분요. 찐독거라 보호자 연락처가 없어요.”
“‘찐독거’요?”
“네네, 뭐. 일단 이혼하셨고. 자녀랑 연락 안 되시고. 형제자매를 비롯해 어떤 보호자도 없는 진짜 독거노인이요.
“아….”
잠시 아연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이 환자, DNR 동의가 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간혹 DNR 동의가 되지 않은 다른 환자 중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다. 지금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는 연명치료 포기를 원하지만, 정작 그 보호자가 직계가족이나 배우자가 아니라서 결정할 수 없는 경우. 예컨대 배우자와 이혼 상태이거나, 자식과 절연한 상태가 그렇다. 현행법상 본인 의사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연명치료 포기를 위해선 배우자나 직계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므로. 그럴 땐 병원은 보호자가 연명치료 포기를 원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심폐소생술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 제가 보호자한테 연락을 드릴 수는 없는 거고…. 제가 사망진단서 작성 외에 추가로 해야 할 일이 있나요?”
“아뇨? 사망선고 해주시고 사망진단서만 써주시면 될 듯해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것, 연락받고 온 보호자가 고인을 앞에 두고 오열하는 옆에서 임종을 선언하는 것. 야간당직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감정적으로 힘든 일들. 그런 과정이 없으니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무게가 덜어질 것 같았지만, 이 환자가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고인의 의무기록을 봤다. “상기 환자 어떤 증상을 주소로 내원하여~”로 시작하는, 두어 단락 정도로 적힌 환자의 과거력만이 쓸쓸하게 남아있었다. 이 사람이 어떤 병을 앓다가 이 요양병원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제외한,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누구와 관계를 맺었으며 죽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알 길은 없었다.
결국 보호자 없이 임종 선언을 진행했다. “환자분 01시 43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옆에서 기다리던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사후 처리를 시작했다. 사후 처리란, 고인이 된 환자의 몸에 꽂힌 모든 라인을 제거하고, 흰색 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 혹시나 모를 사후 분비물을 대비하는 과정이다. 보통은 보호자 앞에서 임종 선언을 진행한 후, 고인을 장례식장으로 모시기 전에 보호자와 분리한 상태에서 –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서 간혹 충격받는 보호자들이 있으므로 – 사후 처리를 진행한다. 이 환자의 경우 보호자를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바로 사후 처리에 돌입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보았다. 혈관에 꽂힌 라인들과 활력징후를 측정하는 장치들이 환자의 몸에서 하나둘 제거되었다. 이내 고인은 흰색 포로 꽁꽁 싸매어졌다. 사후 처리하는 모습은 이미 몇 번 봤지만, 오늘따라 인상에 강하게 남는 느낌이었다.
사후 처리가 끝난 뒤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 환자분은 이제 어떻게 되시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병동에서 저희 업무는 사후 처리까지라.”
“그렇군요. 제가 무연고자 사망선고는 처음이라….”
“아, 네.” 간호사는 사후 처리를 마친 고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저희야 편하죠. 어쨌거나 보호자가 안 계시면 신경 쓸 것들이 적잖아요?”
무연고자라서, 편하다. 그 말이 어쩐지 가슴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나 역시 야간당직의로 일하며 여러 종류의 보호자들을 만났으니. 솔직히 얘기하자면 의학적 판단을 내리고 필요한 처치하는 의사의 본업에서보다 종종 마주치는 이상한 보호자들과 실랑이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컸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채, 임종 선언을 마친 고인 앞에서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편안히 떠나보내는 보호자들이 대부분이긴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있다. 환자가 살아있을 적엔 한 번도 면회 안 오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병원에 와서는 너희가 뭘 잘못했길래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냐고 의료진에게 따져 묻는 보호자. 지금 위급하시니 임종 전에 면회 하시지 않겠냐 물어도 “아, 네. 뭐, 돌아가시면 연락하세요.”라고 답하고 끊는 보호자. 그걸 넘어 “그 인간 죽으면 연락하라고!”라며 짜증을 내는 보호자. 이 외에도 별의별 보호자들을 보다 보면 가끔, ‘보호자’라는 표현이 적절한 단어인지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러나 간호사의 표현처럼, 이 환자는 연고가 없는 ‘진짜 독거노인’이었다. 그 어떤 보호자도, 하다못해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짜증 낼 보호자조차 없는 사람. 병원에 등록된 어떤 지인의 연락처도 없고, 업무적으로 이 사람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의 번호뿐인,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망에서 벗어나 있는 이의 죽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혹은 슬퍼할 수조차 없는 죽음이라니.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의문도 들었다. 그러면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 절차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사람들은 어떠한 장례 절차도 없이 곧장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걸까?
다음 날 아침. 근무를 마치고 나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 절차에 대해 찾아봤다. 보통의 경우 사망한 무연고자는 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하는 무빈소 직장(直葬)의 방식으로 절차가 진행된다. 장례식조차 없이 바로 시신만 화장하는 것이다. 이들의 유골은 무연고 추모의 집에 5년 동안 안치되고, 5년이 지나면 합동으로 안장된다. 그 절차를 적은 문서엔 인간의 마지막을 대하는 관심이나 존중보단 으레 해야 할 행정적인 절차쯤으로 여기는 뉘앙스가 묻어났다.
문득 영화 <스틸 라이프(2014)>가 생각났다. 망자가 고독사한 현장에서 유품을 수습하는 공무원 존 메이의 이야기. 존은 어떻게든 고인의 지인들에게 연락하여 사람들을 장례식에 오게 한다. 물론 아무도 장례식에 오지 않고, 존과 신부만이 고인의 장례식에 참석할 때도 많다. 본인도 타인과 교류가 거의 없는 사람이지만, 자신보다 더 외로운 이들의 장례를 위해 분투하는 존 메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도, 인간 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가 있지 않은지. 그런 것들은 현대 사회의 여러 명분에 – 경제적인 이유든,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서든 - 의해 너무나도 쉽게 무시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정말로 인간의 삶, 특히나 배웅할 이들이 없는 외로운 이들의 죽음에서 의미를 찾기란 불가능한 건지.
영화에 이어 어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생각은 더 복잡해졌다. 어제 그 환자처럼 이혼이나 가족과의 단절, 사회적 고립 같은 것들이 어떻게 한 사람을 ‘연고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분명 연고 없이 태어나 연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텐데. 즉, 무연고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무연고자가 되어버리는 사람만 존재할 터인데. 나 역시 삶의 끝에 다다를 때쯤, 다른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온전한 채 남아있을 수 있을까. 그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존 메이처럼, 나 역시 무연고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나는 존처럼 고인의 과거를 찾아 나서지도, 장례를 준비하지도 않는다. 그러기도 힘들고, 이 환자의 지인들을 알아볼 방법도 딱히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으로는 남을 수 있다.
난 기억할 것이다. 2023년의 어느 날, 새벽 1시 43분, 조용한 병실에서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그 순간 적어도 한 사람은 그의 곁에 있었다는 것을. 이걸로 충분치는 않겠으나, 아무 의미도 없진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