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인 의사 선배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양병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분께선 현 체제에서 운영되는 요양병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분이 말씀하신 얘기 중 한 마디가 내 귀에 박혔다.
“마루타처럼 다 죽어가는 사람들 한 방에 6명씩 꽉꽉 채워서 입원 시켜놓고, 목숨만 붙여놓은 채 돈 타 먹는 게, 그걸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니?”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진이 들으면, 또 요양병원에 가족을 맡긴 보호자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임은 분명하다. 표현이 거칠고 앞뒤 맥락이 잘려서 그렇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선배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보완해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요양병원에선 의료 전문가로서 환자의 건강을 증진해야 마땅한 의사가, 더 이상의 의학적 처치가 무용한 생애 말기 환자들에 대해서, 전인적인 보살핌을 제공하기는커녕 무의미한 약물 처방과 연명치료를 이어나가며 병원을 경영한다. 이 풍경에 대관절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나는 쉽사리 답할 수 없다. 나는 환자를 직접 보는 주치의는 아니었고, 주치의들이 없는 밤에 그 대용으로서 근무하는 야간당직의였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경험한 요양병원이란 직원 대부분이 퇴근한 밤의 모습,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에 불과하므로. 한정된 식견으론 편향되거나 불완전한 답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나는 ‘마루타’라는 단어를 듣고,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햇볕을 맞으며 말라가는, 곰팡이가 슬은 고구마들. 어디서 이런 이미지를 접했는지 고민하던 중, 기억 저편에서 팍하고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다음은 이소연 시인의 시, <욕창>의 전문이다.
욕창, 이소연
도마뱀은 고구마줄기 속에서 나왔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햇볕들
땅속에서 아문 것들이 밖에서 눈을 뜨는 아침이다
줄기만 고랑에 심어놓았을 뿐인데
고구마가 쏟아져 나온다
호미로 찍힌 곳이 흙으로 채워진다
엄마는 길가에 고구마를 깔아놓고 잘 마르라고 둥글린다
햇볕이 만들어놓은 오늘의 정물화
가지런히 말라가는 것을 본다
초록 요양원 옆 고구마 밭
할머니가 누워 있던 침상 같다
좌우로 몸을 뒤집어주는 일을 하면서 엄마는
맞닿는다는 게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맞닿는 입술 같은 걸 떠올렸다가
링거 같은 줄기 평평한 곳 어디에나 꽂아두면 잘 자라고
고구마는 흙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하는데
포항에서 보내준 고구마는 박스 속에서 곰팡이가 슬어 간다
저걸 언제 다 먹을까
‘짧게 사는 것도 복이라는 말’ 한마디 잘라놓고
달아나는 햇빛 도마뱀
아마도 시인은 요양원에서 일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혹은 직접 요양원에 가서 할머니를 뵀던 경험을 가지고 시를 썼을 것이다. 햇볕에 둥글리며 말라가는 고구마, 그런 고구마에 꽂힌 링거 같은 줄기, 박스에 담긴 고구마에 슬어가는 곰팡이…. 이런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시인의 시선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시인은 요양원에서 오랫동안 누워있다가 욕창에 걸린 노인들을 보며, 마치 곰팡이 낀 고구마들이 줄줄이 놓인 것 같다고 느낀 게 아닐까? 욕창에 걸리지 않도록 체위를 이리저리 바꾸는 모습이 마치, 고구마를 잘 말리기 위해 둥글리는 것처럼 보였던 건 아닐까. ‘짧게 사는 것도 복이라는 말’라는 구절로 시의 마지막 연을 장식한 시인의 시선은, 일반적으로 요양원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꽤 다르긴 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시선도 이해가 된다. 어쩌면 요양병원의 풍경은 요양원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패혈증에 시달리며 의식이 희미한 상태로 가쁜 숨만 쉬는 환자도 있었고, 스스로 숨을 쉴 수 없어 인공호흡기에 자신의 숨을 맡긴 채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환자도 있었다. 많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 환자의 경우 낙상은 심각한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기저귀를 채우고 침대 옆의 사이드바를 올린 채 화장실을 못 가게도 했다. 간혹 콧줄을 자주 빼거나 소변줄을 잡고 빼려는 환자들의 경우 신체 보호대를 착용시키기도 했다. 자발적인 움직임은 통제되는, 내 생활 대부분이 타인에 의해 이뤄지는 생활. 어쩐지 둥글려지는 고구마가 생각났다.
여전히 나는 선배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 하지만 고민하다 보니, 그 질문의 전제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연 요양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단지, '다 죽어가는' 사람들일 뿐일까? 짧게 사는 것을 무조건 ‘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애의 말기, 끝자락에 도달한 삶에는 의미가 없는 걸까?
사실 나도 한때는 비슷한 회의감을 느꼈다. 언젠가 요양병원의 다른 주치의 과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 환자들, 극적으로 상태가 좋아질 희망을 품기엔 이미 늦은 사람들. 그런 환자들만을 보다 보면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기 힘들다는 말씀이었다.
실제로, 야간 당직을 서면서 봤던 환자 중에는 의식이 희미하고 자발적 움직임이 거의 없는 분들도 있었다. 때로는 연명치료가 고통만을 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환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황도 있다. 환자들이 잠든 밤, 규칙적인 쉬이익 소리만 들리는 어두운 병실. 기관절개를 한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환자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나 역시 부정적인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하지만 근무하던 도중 나는 다른 장면들도 목격했다. 보행기에 상체를 의지한 채 흔들리는 다리를 한발씩 내디디며 완고한 태도로 복도를 걸어가던 할아버지의 완강한 표정. 귀는 잘 들리지 않아도 가족이 면회 올 때마다 눈빛에 어떤 힘이 돌던 할머니의 말투. 임종 직전 환자에게 면회를 와서 자신의 다짐을 읊고 환자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던 보호자의 뒷모습 같은 것들.
어쩌면 내가 처음에 떠올렸던 고구마의 이미지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햇볕 아래 둥글려지는 고구마들이 단순히 곰팡이가 슬어가는 것뿐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 고구마들도 한때는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통해 영양분을 주고받으며,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자라났던 것들이다. 둥글려지며 말라가는 과정조차도 필요한 시간일 수 있다.
요양병원이 현재의 의료 체계 안에서 갖는 구조적 한계들을 부정할 순 없다. 충분하지 못한 인력, 경제적 논리에 치우친 운영 방식, 형식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돌봄의 현실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생명이 생명으로서 존중받는 순간들, 작은 돌봄을 통해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완전히 외롭지만은 않게 채워지는 순간들. 이제는 안다. 모든 환자가 의미 있는 순간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내가 해왔던 일들이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어왔다는 것을. 그렇기에 고민을 계속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