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객관적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by 암콤

상상해보자. 평소 대포집에서 소주 한 잔 하는 게 최고의 ‘맛’이라 생각하는 당신은 애인과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고자 한다. 노력 끝에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예약에 성공한다. 함박웃음을 짓는 애인과 함께 레스토랑에 자리한다. 작은 한 입 거리들에서 메인 디쉬, 마무리 디저트까지. 코스를 모두 먹었다. 그러나 당신 마음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 ‘맛’을 굳이 이 가격에… 대포집 서른 번은 먹을 가격이네… 아깝네…” 제 아무리 미슐랭 레스토랑이더라도 그곳은 당신에게 ‘맛’없는 집으로 기억된다. 이럴 때 우리는 소위 “‘입맛'은 제각각이고, 취향은 주관적이니까”라고 말한다.


맞다. 취향은 주관적이란 말은 어떤 면에서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콘텐츠, 특히 스토리를 다루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이 말은 대체적으로 진실에 가깝게 여겨진다. 한 평론가는 자신의 별점을 취지를 설명하면서 “재미는 주관적이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은 다양하니까요”라며 재미에 대한 상대주의를 선언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말은 남들과 다른 독특한 취향을 가진 영화 및 드라마 애호가 사이에서 일종의 사이다와도 같은 말이 되었고, 꽤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바꿔서 상상해보자. 당신은 유명 외식조리학과에서 공부까지 한 외식계의 인재다. 당신의 목표는 파인다이닝 업계에서 역사를 쓸 오너셰프가 되는 것이었고, 이제 식당 오픈을 앞두고 있다. 서울에 있는 파인다이닝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식당은 모두 찾아간다. 어느 식당은 당신 입맛에 딱 맞지만, 어느 식당은 당신 입맛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 입맛에 맞지 않는 식당은 미슐랭 별을 2개나 받은 곳이다. 더욱이 대중적인 평 역시 극호이며, 평가 수도 상당하다. 당신은 어떻게 할 텐가? 당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니 “역시 입맛이란 건 제각각이고, 취향이란 건 주관적이니까”하고 무시할 텐가? 아니면 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가 무엇이고, 그 맛을 좋아하는 이유를 분석할 텐가?


관점을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바꾸니 진실 같았던 말도 그 효과를 잃는다. 안타까운 것은 콘텐츠 업계에선 생산자들과 생산자가 되길 희망하는 지망생들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에서조차 전자의 관점처럼 ‘재미’를 다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프로듀서들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쉽사리 나누고 시작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상업영화여서 추구해야 할 ‘재미’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을 수가 없다. 추측하건대 그 기저에는 “재미는 주관적이니까”라는 명제가 깔려져 있는 것 같다. 교육기관의 경우 더 심각하다. 무엇이 재밌는 것인지, 그 재미의 차원이 다양하다면 하나씩 가르쳐도 시간이 모자른데, “너희들은 예술가다”라는 추상적 명제만 심어준다. 영화학교를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특히 영화과는 유독 이 경향이 심해서 연출지망 학생들은 기술을 도외시하고, 자기만의 예술을 향해 야심차게 항해를 시작한다. 이런 교육의 세례를 받고 예술적 야심을 가졌던 사람들 중 내가 아는 몇몇은 점점 영화보는 게 즐겁지 않다며 영화보기를 꺼려하기까지 했다.


물론 예술가적 자의식과 야심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때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이란 건 표준이 필요하고, 그 표준은 ‘예술’이 아니라 ‘산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이다. 프로듀서들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나 감독에게 상업영화를 지향하는지 독립영화를 지향하는지 묻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포지셔닝이란 이상한 마케팅 용어를 창작을 돕는 위치에서도 피드백으로 사용하는 걸 적잖이 본다. 그런 책임지지 못할 말보단 현재 만난 콘텐츠 창작자가 지향하는 장르들을 분석하고, 그 장르를 즐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를 객관화시키는 게 진정한 피드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연재 글에서 “‘재미’는 객관적이다”라는 주장을 펼 것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재미’는 객관적 실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나에게 재미없는 것은 재미없는 것이지만, 생산자 입장에선 나에게 재미없다고 해서 재미없는 게 아니다. 생산자들은 ‘재미’란 실체를 가지고 대화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콘텐츠 업계, 특히 실질적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재미’야말로 창작자(작가, 감독)와 제작자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