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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런던

영국 일주 욕망에 제대로 불지핀 하루짜리 여행

by 딱정벌레
사진 1번 타워브리지, 2~3번 탬즈강 유람선 선착장, 4~5번 런던 거리 풍경. 사진=딱정벌레

영국 땅을 처음 밟은 건 2018년 서유럽 여행 때였다. 서유럽 일주 첫 코스가 영국이었고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에서 귀국 비행기를 탔다. 영국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다. 첫날 저녁 도착해서 잠만 자고 다음 날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빠듯하게 구경한 다음,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했다. 엄밀히 말하면 여행한 시간이 하루도 채 되지 않는다. 머문 시간은 하루쯤 되겠지만- 영국 여행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였기 때문에 이런 코스에 만족할 수 없다. 이듬해 영국 일주를 계획한 데에는 이 여행도 영향을 끼쳤다.

저녁에 도착해선지 숙소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려선지 모르겠지만 영국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서 무서웠고 길도 깜깜했다. 숙소도 깔끔하지 않았고. 피곤에 찌들었고 머리는 떡지고. 시차도 8시간 차이라서 애매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침 일찍 조식을 먹은 뒤, 숙소를 나섰다. 출근 시간대라서 차가 무척 막혔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곳은 런던 타워 근처. 타워는 지나가면서 전경만 구경하고 타워브리지 근처에서 탬즈강 유람선을 탔다. 사진 속에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이제는 낯설기만 하다.

탬즈강 유람선은 타워브리지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이동했다. 안내 방송이 나오지만 잘 들리지는 않았다. 탬즈강 주변에는 중요한(?) 건물이 너무 많아서 이야기를 들어도 금세 까먹는다. 이날 날씨는 화창했고 따사로운 햇볕을 받는 타워브리지는 위엄이 넘쳐 보였다. 저 다리가 도개도 한다고 하니. 타워브리지는 낮에 봐도, 밤에 봐도 멋지다. 이 다리 위를 왕복으로 오갈 때는 기분이 더 좋았기도 하고. 첫 여행을 갔을 때는 배를 타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지만. 실제로 내 발을 디딜 때가 가장 실감 나고 벅찬 것 같다.

사진 2번 런던 아이, 3번 빅벤. 사진=딱정벌레

빅벤은 2018년에 갔을 때나, 2019년에 갔을 때나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공사 중이었기 때문. 내년쯤이면 끝나려나. 완공 일정을 들었는데 까먹었다. 간혹 과격 시위대가 빅벤을 올라가서 고공 시위를 벌어기도 하던데 공사 중에 저렇게 올라가는 걸 보니 위험천만하다 싶고. 요즘 같은 시국에 운동단체는 어떻게 시위하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면서 시위하는 곳도 있지만. 배 째라 모드인 곳도 있고. 갑자기 미얀마 현장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런던에 두 번 갔지만 런던 아이는 한 번도 타보지 않았다. 처음 갔을 때는 저쪽으로 갈 일이 없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지만 운행하지 않았다. 저쪽 동네가 정말 재밌는 거 많은데. 관람차 로망이 많은 사람이라- 그 안에서 있었던 영롱한 시간은 언젠가 다 터질 뿐이라는 걸 알지만 관람차는 밖에서 바라만 볼 때든, 안에서 탈 때든 늘 설레고 기대된다.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마지막으로 관람차 탄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능할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높은 곳에서 탬즈강을 내려다보고 싶긴 하다.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차한 뒤, 지하철 역을 잠깐 둘러보고 사원 쪽으로 향했다.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한 리플릿을 인상 깊게 봤는데 바로 'Accessible Travel In London'이라는 책자였다. 교통 약자가 런던 지하철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이 안에 담겼던 것 같은데-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서 따로 챙겼다. 런던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내리기도 했는데 큰 역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러나 저녁 8시만 해도 한산하게 느껴졌고. 영국 정치 중심이지만 여의도와는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다.

사진 1번, 3번 웨스트민스터역, 2번 'Accessible Travel In London' 책자, 4번 처칠 동상, 5번 웨스트민스터 사원. 사진=딱정벌레

웨스트민스터 주변 공원도 런던에 갈 때마다 간 곳인데- 낮과 밤에 각각 간 거라서 역시 느낌이 다르다. 낮에도, 밤에도 늘 사람들로 붐비는 동네인데 밤에는 퇴근 시간대에 가서 그런 듯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때가 좀 더 생동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퇴근 본능을 막 발산해서 그런가. 영국에 도착한 첫째 날 갔던 터라 나도 막 설레서 그럴 수도 있고. 그때가 더 재밌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길 처음 방문했을 때는 관광객이 많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비수기라서 그런지 현지인들로 좀 더 붐빈다는 느낌도 받았다.

주변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 점심을 먹고 버킹엄궁으로 향했다. 근위병 교대식을 주변에서 보고 버킹엄궁은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며 배경 삼아 사진 찍는 정도. 시간이 빠듯했던 터라 교대식도 보고 궁도 외관을 핵심만 보느라 제대로 본 것 같지는 않다. 여왕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각기 다른 깃발을 휘날린다고 들었는데 이날은 여왕이 없는 날이었던 것 같다. 유럽 왕실은 내 눈에 초록이 동색처럼 보여서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하고 안도 찬찬히 둘러보면 다른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하다만. 홀리루드 궁전은 좋았으니까.

근위병 교대식도 거의 끄트머리에 봤는데- 끝나고 들어갈 때 군인들이 얼마나 흐트러짐 없이 각 잡고 이동하나 이걸 주의 깊게 봤다. 모자를 벗는 모습에서 긴장 풀린 느낌을 받긴 했다. 하긴 이 날씨에 저 사람들도 힘들겠지. 갑자기 광화문, 숭례문 앞에 서 있는 수문장들이 떠오르고. 정말 그 시대 사람처럼 근엄한 표정에 절도 있는 모습으로 문 앞을 지키는데- '아, 이 사람들 이렇게 문을 지키는 모습도 어쩌면 그때 그 모습을 연출하는 '연기'일 수 있겠구나.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1~2번 버킹엄궁, 3번 근위병 교대식. 사진=딱정벌레

지금 이 글 쓰면서 약간 신나고 있는데- 여행이 짧고 방문했던 코스에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않아서 그런지 내 말도 굉장히 짧아지고 있다. 왠지 오늘은 글을 금방 마무리할 것 같은 기분? 웬만하면 글 쓸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쓰기는 하는데 너무 길어지다 보니 올해 들어 예년보다 유난히(?) 힘이 부친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왠지 힘을 아낄 수 있을 듯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고대하던 영국을 이런 식으로 방문하고 왔으니 내가 이 여행에 아쉬움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영국에 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중간에 트와이닝스 레이디 그레이 홍차를 사고 대영박물관에 갔다. 여기는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는데 영국에서 들렀던 박물관 가운데 이런 곳이 제법 있었다. 대신 기부금을 받는 곳이 있다. 이건 내도 되고, 안 내도 되고. 대영박물관도 기부금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궁전이나 비틀즈 스토리, 영국 음악 박물관 같은 곳은 입장료를 받았다. 누가 대영박물관 입장료가 없는 이유로 '훔친 물건이 많아서'라고 드립을 친 적이 있었다. 되게 웃겼는데- 혹자는 그나마 양심이 있어서 무료로 운영한다는 말도 했다.

대영박물관에서 기억에 남는 유물은 미라, 파라오, 고양이 미라였다. 미라는 볼 때마다 경외심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미라가 발견되는데- '수백 년 세월이 흘러서 후손들에게 다시 발견되기까지 이 미라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걸었을까' 생각하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김새나 현대인보다 작은 키, 고인을 최대한 존중하는 마음에서 마지막까지 정성 들여 입힌 옷, 예를 갖춰 고인을 보내려는 산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그런 것들이 미라를 보는 시선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사진 2~4번 대영박물관 한국실. 사진=딱정벌레

대영박물관에는 한국실이 있다. 도자기나 한국 관련 유물을 전시한 공간인데- 다녀온 지 꽤 돼서 내가 뭘 봤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기부터 제일 먼저 갔는데. 한국실만 있는 건 아니고 다른 나라들도 이런 특별 전시실이 있었던 것 같다. 유물 이야기를 더 하자면- 고양이 미라도 뇌리에 깊이 남았다. 문득 순장 문화도 떠오르고 집사 때문에 냥이까지 고생이 많았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비록 미라이지만 이 와중에 귀여움은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이 세상을 떠난 고양이에게 조금 망측하다 싶기도 하고.

비단 고양이 미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풍속도에서도 고양이 그림을 종종 보곤 하는데- 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고 집사도 아니지만- 이를 바라보는 특별한 마음은 현대인이나 옛사람이나 비슷하다 싶었다. 귀여운데 도도해서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고, 녀석의 간택을 먼저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마음을 줄듯 말 듯 하면서 온갖 교태는 다 부리고. 밀당은 세상에서 네가 제일 최고다. 풍속화에서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미인도 모델을 보는 시선과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어디까지나 내 뇌피셜.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느라 하루도 안 되는 첫 런던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별로 한 게 없어 보이지만 중간에도 밥도 먹고, 쇼핑도 하느라 시간이 빠듯했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여기 근처에 킹스크로스 역도 있었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바로 그곳. 런던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킹스크로스 역은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딥마인드 본사도 이쪽 어디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여권 검사를 하고 출국 수속을 받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겨우 나와서 기네스를 한잔 하고 짧은 런던 여행 아쉬움을 달랬다. 이번에는 이렇게 떠나지만 다음에는 좀 더 길게 제대로 누리고 가주겠다며. 그러고 1년 뒤, 그 소원을 성취했다.

대영박물관 미라와 유물들. 사진=딱정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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