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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Jun 28. 2021

나 자신과 화해한다는 것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가 자아낸 몇 가지 생각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사진 엽서. 사진=딱정벌레

요즘 공연 중인 뮤지컬을 둘러보면 '로봇'을 소재로 한 작품이 눈에 띈다.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온 대중문화 콘텐츠는 수십 년 전부터 있었지만- 빅데이터 시대를 맞이해 인공지능(AI)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과거에 꿈처럼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둘 현실이 되고 있고.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다루는 AI나 로봇 활약도 현실과 동떨어지기보다 일상에 와닿는 모습이 많은 듯하다. 가사 도우미 로봇은 물론이고. 로봇 인격권(?)이나 로봇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라거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가 되고 있다.

이미 말동무 AI를 비롯해 소셜 챗봇으로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AI가 나오고 있고. 올초 이루다 논란도 불씨를 지폈다. AI는 사람이 아니니까 함부로 대해도 되는지, 아닌지. AI 인권까지 고려해야 하는지 등. 사회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담론이 곳곳에서 터졌다.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는 고민. AI고, 로봇이라도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처럼 판단하고 말하도록 프로그래밍됐고, 그들도 사람 데이터로 학습한 거라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고민하는 문제와 이를 AI에 적용할지 말지 여부를 별개로 보기도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고- 최근에 본 작품이 로봇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라서 좁은 의미에서는 상관없을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를 잠시 해봤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라는 작품인데- 유 배우가 나와서 봤다. 소재도 흥미로웠지만- '더픽션' 이후로 유 배우 공연을 못 봐서 갈증(?)이 있었다.  봄에는 여름, 요즘은 늦여름~가을 공연 일정을 기다리는데- 지난해, 재작년 또는 그전에 유배우가 출연한 작품이 올해 하는데 캐스팅 명단에 없는 작품이 많아서 아쉽기도 했고. 오늘 하나 더 나오긴 했다만.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포스터. 출처=아이엠컬처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그동안 내가 본 뮤지컬과 차이점이 많았다. '레드북'과는 비슷할 수 있는데 첫째, 주인공이 여자이다. 둘째, 등장인물은 레드북만큼 아니지만 그동안 봤던 작품보다 더 많았다(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더픽션'과도 등장인물 수는 비슷할 수 있겠다. 플러스 마이너스로 한 명 차이 나지만). 내가 생각해봐도 남자 배우들만 나오는 작품을 너무 많이 봤는데- 지난해 정인지 배우가 나온 '데미안'을 제외하면 거의 그랬다. 관심사를 좇아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뮤지컬 안에서 내 콘텐츠 소비 성향이 편향됐다 싶었다.

셋째, 공연에 안무가 들어갔다. 안무가 대극장 공연처럼 엄청 많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좀 들어갔다. 그전에 본 작품은 레드북을 제외하면 춤추는 건 잘 못 본 듯하다. 물론 '빌리 엘리어트'도 빼고.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에는 왈츠와 비슷한 춤 동작이 들어갔는데 아기자기한 멋이 있었다. 넷째, 무대 세트도 좀 더 화려했다. 그 전에도 중극장이나 소극장 공연에서 크고 작게, 오밀조밀하게 정성껏 무대 세트를 꾸미긴 했지만. 이 작품에는 화면도 몇 개 나오고. 특수 효과(?)도 제법 있었다. 창밖 너머로 해가 비치거나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은.

로봇 이야기로 시작해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줄거리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스포일러가 좀 될 수 있을 듯한데-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남편과 딸을 잃고 혼자 집에 틀어박혀 살고 있는 노년의 엠마가 주인공이다. 그의 집에 '데이케어 로봇'이 왔는데-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정돈하며, 엠마에게 먹을 걸 챙겨주고, 건강도 살핀다. 외곩수에 괴팍한 엠마에게는 너무 성가신 존재. 처음에는 많이 구박했지만 막상 그에게 나사가 빠지고 작동이 되지 않을 때는 엠마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

관람일 캐스팅 현황과 줄거리 안내. 사진=딱정벌레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선지, 다른 조치를 더 취해선지 몰라도 로봇은 회복했고 다시 작동했다. 다음에 또 고장 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엠마에게 "그때도 당신이 고쳐주면 되지 않냐"라고 해맑게 말한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작동하는 로봇이니 특별한 감정을 느낄 새가 없어 보이지만- 그 감정조차도 계산된 프로그래밍 결과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을 주민 이주 명령 알림을 거부하는 모습에서 로봇의 주관(?)도 엿볼 수 있었다. 그것도 프로그래밍의 산물 아닌가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말이다.

이 로봇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엠마와 먼저 세상을 떠난 엠마 남편 스톤 말투와 종종 겹친다. "먼지 농도 질식 수준"이라거나, "지금 밖에 나가면 우리 둘밖에 없을 거"라는 말이나(눈 올 때 했던 말). 그 뒤에도 다른 멘트가 더 나온다만. 로봇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로봇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중요한 장치이긴 한데 내가 받아들인 건- 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과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난 상처에 얽매여 살아가는 엠마. 그가 트라우마 벽을 부수고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 이게 핵심이라고 봤다.

물론 거기에는 로봇이 많은 역할을 했다. 그가 엠마를 위해서 하는 일은 모두 엠마를 귀찮고 성가시게 하는 일이었지만. 엠마가 현재 자신을 마주하고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영향을 끼쳤다. 엠마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싶기도 하고. 엠마는 평생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지만 로봇 덕분에 눈이 왔다고 함께 밖에 나가보기도 하고. 매일 초인종을 누르던 소년에게 "또 와달라"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고. 로봇이 언제까지나 엠마 곁에서 보살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스스로 세상과 소통하며 변화하도록 로봇이 기여했다.

'로봇'역 맡은 유승현 배우. 출처=아이엠컬처

그것보다도 내가 이 작품에서 주목한 건 엠마가 과거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후회스럽고, 밉고, 괴로웠던 '나'였지만- 나중에 과거 자신과 끌어안고 화해한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애드리브인지 각본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걸어가는 모습에서 감정이 격양된 게 느껴졌고. 남편과 딸을 떠나보내면서 고통스러웠고 자신이 무력하다는 생각도 했을 텐데. 그래서 환영으로 과거 자신을 보는 것도 두려웠을 텐데. 이제 그 마음의 짐 또는 죄책감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하나. 자신을 괴롭게 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그걸 보면서 느낀 점은- 보통 어두운 기억은 되새기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잘못한 흑역사든, 내가 피해를 입은 고통스러운 기억이든. 가급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쉽게 잊히지는 않는다. 굉장히 오래된 일인데도 떠올리면 여전히 눈물 나고. 감정이 동요하는  싫어서 생각을 피한다.  기억을 경멸하고 미워하는데- 그것도  일부이고,  역사이며,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사료 싶었다. 떠올리면 아직 힘든   아쉽지만- 힘든 기억도 담담히 마주하고 자기 고통도 거리 두고 객관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잘 안 되면 엠마처럼 평생 스스로를 미워하고 괴롭히며 섬이 될 수 있다고. 자신을 소모할 뿐이고. 앞으로 살면서 그런 일은 또 있을 텐데. 그때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회복탄력성을 의식적으로라도 훈련해서 내면화해야겠다 싶기도 하다. 엠마가 안타까웠던 건- 그게 엠마 잘못이 아닌데 자신을 벌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벌준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닐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외부 충격이든, 내적 갈등이든 화살이 결국 자신을 향하고 스스로 좀 먹일 때가 있는데. 그 상황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같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포토존. 사진=딱정벌레

이 작품이 슬프다는 사람들도 많던데 결말이 슬픈 건 아니라서 난 슬프지 않았다. 다만 엠마를 보면서 내 노년을 잠시 그려봤다.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래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려면- 지금도 쉽지 않은데 몸이 노쇠하고 마음도 허약해질지도 모를 그때. 난 무엇을 동력으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내게도 그 미래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바심도 났다. 그러면 지금 뭘 해야 할까. 내가 하는 일은 내 노년에 도움되는 일일까.

난 이 작품을 감명 깊게 봤는데- 초연을 봤던 사람들은 부정적 반응도 보였다. 일단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고. 무대 세트도 그런 듯하고. 음악도. 난 초연을 안 봐서 이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괜찮고 마음도 뭉클했다. 선배에게 이야기하니 N연 작품이 나올 때마다 늘 있는 반응이라고 하던데- 아까도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감상평을 보다가 장문의 혹평을 봐서 깜짝 놀랐다. 논리적으로 분석하긴 했던데- 정작 좋게 봤던 내가 허술한가 싶은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런 건 필요 없다. 내가 좋고 의미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정서가 메말라선지, 마음이 척박하다고 스스로 느껴선지 최근 며칠 간격으로 공연을 봤다. 기다렸던 공연들이 이제  하나둘 시작되기 때문도 있고. 할인 기간에 맞춰서 예매를 하다 보니 관람 시기가 엇비슷하기도 하다. 보고 싶은 작품이 최소 3  있는데 내게 선물 준다는 의미에서 시기상 간격을  띄우고 봐야겠다. '해적', '아르토, 고흐', '메리 셸리' . '8월에 보면 가을에   없는  아냐?', ''레베카' 하겠지', '올해는 '키다리 아저씨’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요즘은 이런  생각하는  재미있다.

이디야커피 유승현 배우 생일 기념관(?). 사진=딱정벌레

그렇잖아도 이번 달에는 유 배우 생일이 있어서 대학로 카페들이 유 배우 생일 기념관 마냥 장식됐다. '대학로 슈스스'라고도 하던데- 지하철역 광고는 기본이고 대세남 느낌. 저저번 주말, 저번 주말에 성지 순례하는 것 마냥 카페를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음료도 사 마시고, 카드와 홀더도 받았다. 칙칙한 일상에 소소한 재미. 이제 기념관(?)은 거의 끝나고 이디야 커피만 30일까지 저렇게 운영한다. 1인 빙수가 나왔다고 해서 그거 먹을까 하다가 요즘 식단 조절 중이라 그냥 아메리카노 마셨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보고 여운에 잠긴 상태로 카페 가서 유 배우 사진을 보고 마음을 추슬렀다. 지난번 레드북 공연 때 공연장 밖 현수막 사진을 찍는 걸 깜박해서 다시 가서 찍고. 그 전에도 공연 안 본 건 아닌데 요즘 대학로가 더 특별하게 와닿는다. 내가 너무 칙칙하게 살았구나 싶고. 정인지 배우가 연극 '렁스'에 나온다고 해서 보고 싶고.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마음 편히, 스스로 합당한 선물을 받듯 보람되고 뿌듯하게 즐기고 싶어서.

대학로 프롬 하츠 카페 유승현 배우 생일 기념관(?). 사진=딱정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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