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절정에 달한 요즘이다. 아직 더 필 꽃이 남아있긴 하다.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 쉬어가는 타선이 없다. 그만큼 자연은 경이롭기도 하다. 날이 춥든, 따뜻하든 기온과 기후에 맞춰 최적화된 생명력이 저마다 있으니까.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도 그렇긴 하다만. 이건 인위적인 노력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 적응해 왔고 그 결실이 이렇게 맺어진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만. 나이가 들면서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많은 걸 실감한다.
마음이 바쁘고 잘 지치는 날이지만-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짬이 조금 나서 그런지 저저저번 주말부터 바깥나들이를 조금씩 하고 있다. 마음은 멀리 가보고 싶지만 그건 어렵고, 피곤하기도 해서 가까운 곳 중심으로 다닌다. 이럴 때 대도시 인프라가 참 도움이 많이 된다. 대중교통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집 근처도 좋은 곳이 많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발걸음이지만 1년에 한 번뿐인 계절의 성찬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누리기로 했다.
확실히 힘이 많이 된다. 비싼 입장권을 내고 볼 필요도 없고, 자연스럽게 눈앞에 펼쳐진 모습만 보고 즐기면 된다. 부담은 덜하고 내가 얻는 기쁨과 감격은 매우 크다. 자연의 순환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듣고, 우리가 구두로 약속한 건 아니지만 알아서 정해진 시기에 기대한, 그 이상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우리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집에서 작은 화분을 키우면서도 식물에 많이 배우는데 필 때와 질 때를 알고 정해진 루틴을 묵묵히 살아가고 어떨 때는 놀라운 생존력을 발휘하며 버티는 모습에 용기도 얻는다.
이 글을 시작한 건 일주일 전인데 그때는 자연의 축복에 크게 감화받아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번 주는 생각보다 할 말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자연의 감동이 적었던 건 아니고 과분할 만큼 자연의 축복을 한껏 누렸다. 이래서 봄이 좋다는 생각도 들고. 죽어가던 생명도 힘을 얻어 다시 소생하는 계절. 굳게 닫힌 마음도 자연이 새롭게 순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레 열리고, 늘어지던 몸도 다시 곧추세운다. 내가 놓치는 게 있을까 봐 자연을 예의주시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다시 꽃구경하면 느낀 건- 고궁은 갈 때마다 늘 새롭다는 거다. 많이 가봤고,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풍경이 많다. 봤고 알아도 달라 보이는 것도 제법 있고. 덕수궁에서 본 명자나무나 자두나무나 앵두나무가 그랬고. 창경궁 백매화와 홍매화는 이번에 처음 보긴 했다. 봄꽃이 핀 옥천교는 참 아름다웠다. 봄꽃 너머 보이는 홍화문도. 봄에 보는 대온실도 훈훈했고, 지금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동백꽃이 또 필 준비를 하는 것도 반갑고 보기 좋았다.
덕수궁 석조전 뒤편을 우연히 봤는데 앞태뿐만 아니라 뒤태도 격조 있고 멋있었다. 오얏꽃 무늬가 새겨진 모습도, 위엄 있어 보였다. 비록 나라가 힘이 약해지던 시기지만. 덕수궁 연못 주변에 봄꽃이 만발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역시 가장 화려한 계절은 봄이구나 싶고. 창경궁은 웬만한 꽃은 다 피고 진 뒤에 간 적이 많았는데(창덕궁을 먼저 가느라 늘 소홀했던) 이번에는 봄꽃이 절정을 이룬 시기에 가서 볼거리가 더 풍성했다. 벚꽃도 보고. 두 개의 나무가 한 몸을 이룬 모습도 이번에 처음 봤다.
올봄 내가 꼽은 벚꽃 핫플레이스는 성내천이었다. 이사 이후 안양천과 멀어진 아쉬움을 성내천에서 달랬다. 여긴 그야말로 벚꽃 터널을 이뤄서 걷고 있으면 황홀한 기분도 들었다. 직장 동료가 추천해 준 코스를 A부터 Z까지 다 걷지는 못해도 웬만큼 소화했다. 지난 총선날에도 걸었는데 늦게 핀 꽃도 있는 듯했다. 거긴 올림픽공원인가. 석촌호수도 화려하지만 성내천은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도 들어 정겨웠다. 이제 소문나서 내년은 더 붐빌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강박관념에 빠져 봄꽃을 구경하고 다닌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그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좀 편하게 꽃을 보고 싶었다. 지난주만큼 볼 꽃이 많지는 않고 이제는 라일락과 영산홍, 철쭉, 이팝나무, 겹벚꽃, 튤립 시간이지만. 개나리도 지고 있고. 응봉산에 처음 가봤는데 듣던 대로 전망이 참 좋았다. 초입에 계단을 좀 오르긴 했지만 오랫동안 오르지 않아도 되고 전망대에 금방 도착해서. 아차산보다 더 편하게 전망을 구경했다. 높이는 낮을 수 있지만 그래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좋다.
자연에서 힘을 많이 얻는 요즘이다. 집에 있는 스파티필름도 꽃을 피웠다. 모든 스파티필름이 꽃을 피우는 건 아니지만 이건 어쨌든 피웠다. 새삼 생존에 위협을 느꼈나 싶기도 하고.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자연으로 위로받는다. 갑자기 더워져서 이모 말씀대로 이제 4월이 신록의 계절이 된 듯도 하다. 지난주에 찍은 필름을 스캔했는데 구도가 아쉬운 사진도 있고, 카메라 스트랩이 같이 찍혀서 망친(?) 사진도 있고, 괜찮은 사진도 있긴 하다.
코닥 골드로 이번에 처음 찍어봤는데 이제 꼭 높은 감도 필름만 고집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컬러플러스는 어찌 나올지 모르겠지만. 춘당지 연못에서 행인과 서로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그분이 찍어주신 내 사진도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내 모습 궁금해할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라 가족 채팅방에 공유했다. 사진을 반가워해주고, 좋아해 줄 유일한 사람들. 40년 전 카메라를 지금도 현역으로 쓸 수 있어 좋다. 이 카메라로 나와 가족, 친척 평생을 기록할 수 있다면 영광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