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올해 첫 연차를 냈다. 그 주 월요일부터 일주일 내내 허리가 좋지 않았다. 컨디션도 나빴다. 월요일 새벽에 가위에 눌리고 피곤한 상태로 화요일에 출근해 늦게 퇴근했다. 수요일에는 허리가 더 불편해져서 원래 계획한 시간에 일어나기 힘들었다. 피로와 허리 통증이 겹친 상태로 하루를 보냈고, 몸에 힘이 살짝이라도 들어가면 통증이 더 심해졌다. 저녁께 되니 숨쉬기도 벅찬 느낌이었고, 회복을 위해 칼퇴 또는 가급적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차 내는 걸 자제하려는 편이라 이번에도 어떻게든 참고 싶었지만 그날 통증은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작년에 장염에 걸렸을 때 고열이 며칠 동안 나고 설사에 시달려도 어떻게든 버티고 절대 연차를 내지 않았는데 외과 쪽이라서 그런지 게다가 허리는 더 중요하고 위험하단 생각이 드니까, 무엇보다도 앉아있는 게 통증을 더 키우고, 앉아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상태 파악을 위해 연차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병원 진료에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으니 반차보다 연차가 더 나을 듯했다. 그래도 올해 한 번도 연차를 내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덜 민망하고 염치없지만 않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신기한 게- 다음 날 출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생각보다 마음의 평안을 줬다. 이건 주말 휴무와 느낌이 달랐다. 그렇지 평일 휴무는. 평소였다면 생각지 못한 시간대와 장소에서 생각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고, 그 일이 여유 있으니까. 동료들이 격무 중일 때 나 혼자 쉬는 건 미안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회사와 다른 시공간에 있다는 게 실감 나고, 그게 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허리 때문에, 피로로 많이 버거웠는지, 아님 그동안 연차 하루 안 내고 계속 출근해 정신적 긴장 상태를 어떨 때는 주말에도 유지하느라 지쳤는지 다음 날 아침에 조금은 평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제 조금 마음을 살짝 내려놓아도 된다 싶기도 하고, 그날 하루는 허리 회복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럴 수 있어 감사하고 다행이었다. 허리가 좋지 않을 때 오래 앉아있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데 현대인들의 업무가 아무래도 좌식 활동이 많다 보니 그게 쉽지 않다. 스탠딩 데스크를 쓰면 서서 일할 수 있지만 서서 일하는 것도 다리에 무리가 가는지라. 지난번 회사 행사로 하루종일 서있었던 적이 있는데 다음 날 하루종일 다리가 붓고 너무 아팠다. 피가 안 통하는 느낌마저 들고. 나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아팠다는데 서 있으면 무게 중심을 온전히 버티느라 다리에 무리가 간다. 저녁에는 비가 엄청 내렸는데 낮에는 예보대로 폭염이 심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햇살이 강렬했다. 매미는 어찌나 시끄럽게 우는지 귀가 얼얼했다. 동네 아파트를 가로질러 상가 3층에 있는 정형외과에 갔다. 환자가 많았지만 금세 진료를 봤다. 엑스레이도 금방 찍고 의사 선생님도 진료에만 집중해 주셨다.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날이 더워서 상가 건물을 떠나기 아쉬워 괜히 1층 슈퍼를 맴돌았다. 총각네 야채가게에서 군고구마를 샀다. 맛있으니 다음에 먹어보라는데 지금 달라고 요청해서 구매했다. 상가 주변에 오면 뭔가 먹고 싶고 구경하고 싶고 그런가 보다.작은 카페가 있었다. 괜히 궁금해서 언제 한번 가봐야지 했는데 그날 지나친 김에 가봤다. 산책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마셨으면 해서. 정작 내가 사마신 건 토닉 커피. 뭔지도 모르고 주문했는데 탄산이 들어간 커피였고 맛있었다. 커피를 들이키며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최근 몇 주(?) 한강에 잘 가지 않아서 오늘 같은 날 가보고 싶었다. 평일에 가면 색다르지 않을까. 최근 장마로 한강 수심이 불어서 그런지 한강과 인접한 산책로는 모두 통행을 막았다. 좀 떨어져서 집 방향으로 걸었는데 철교에 너무 금방 도착해서 더 걸었다.
철교 주변에는 왜가리가 먹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한강공원 끝까지 가지 않고 대교 남단까지만 걸었다. 오랜만에 미루나무를 가까이 봐서 좋았고, 자연경관이 살아있으며 생태계를 그대로 보전한 한강공원 수풀도 보기 좋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어떤 공터에 철조망이 높게 쳐져서 대교가 시야 방해 없이 깔끔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철교를 지나면 지하철이 오가는 소리가 웽하고 들리는데 난 그게 도시의 소리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소리일 수도 있겠다.
매미 울음소리는 여름의 소리. 귓가에 이어폰을 꽂고 내가 선곡한 음악을 듣지 않아도 이 도시의 소리와 여름의 소리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철 소리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계절을 느낄 수 있어서, 내가 발 딛고 사는 시공간을 실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땀이 흘러도 집에 가서 씻으면 되니 괜찮았고, 이 감성에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김연수 작가 소설 같은 게 어울릴 듯했다. 아님 에세이나. 그날은 책을 읽더라도 평소 의무감에 읽는 IT 도서나 경영서 말고 말랑한 에세이나 인문학 서적, 소설, 시를 더 읽고 싶었다. 휴대전화로 한강 사진을 찍고 여름의 소리와 풍경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는데 구름 풍경이 일본 애니메이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구름도 서서히 가을을 닮아가는 모습이었다. 터덜터덜 걸어 책보고로 갔다. 이전에 지나갈 때는 운영 시간이 아니라서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운영 시간 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재와 북카페를 결합한 분위기였다. 요즘 핫한 대형서점 인테리어를 닮은 듯하고. 그래도 책 읽는 공간이라 대체로 조용했다. 방문자도 다들 책 읽거나 노트북으로 작업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주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책보고를 둘러보고 귀가했다.
샤워한 뒤, 군고구마를 먹고 약을 먹고 사진을 정리했다. 사고 싶던 오설록 녹차가루를 사고, 커피샷을 추가한 아이스 녹차 라테를 다음 날 마시고 싶다는 생각 따위를 했다. 이따금씩 회사 메신저와 업무 도구를 확인하고. 지금 이 순간 휴무 분위기나 여운을 더 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구나. 하루 쉬어가는 게 숨고를 틈을 주고, 여유를 주는구나. 그날 그 여유가 참 좋았다. 리프레시할 여건이 허락됨에 감사하고, 잘 회복해서 다시는 똑같은 일로 또 이런 연차를 내지는 않아야 한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