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1인 가구에게 주는 의미
내겐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
사진=픽사베이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물론 세대주로 나 혼자 살고 있는 지금 집 말이다. TV를 두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 필요하지 않다.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 TV 볼 시간이 없다. TV 말고도 볼 게 많다. 책을 읽거나 큐리오시티 스트림 또는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보는 게 더 만족스럽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로 얼마든지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도 딱히 없다. 작년에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정도 꾸준히 챙겨봤을 뿐. 올해 '부부의 세계'도 기사로만 읽다가 본가에 가서 처음 본방을 봤다. 언제든 여길 떠날 수 있도록 짐을 가볍게 두려고 한다. 뭔가 사더라도 실컷 쓰다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걸 사고.
그렇다고 TV가 내게 아무 의미 없는 건 아니다. 사실 1인 가구 입장에서 TV는 의미가 크다. 의미가 크다 못해 짠하기까지 하다. 내게 TV=가족이다. 아무래도 부모님과 언니가 있는 본가에 가야 TV를 보는 영향도 있다. 본가에 와서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고 이 채널, 저 채널 재핑 하다 보면 그제야 내가 집에 온 게 실감 난다. 가족들은 자주 봐야 한 달에 한 번, 두세 달에 한 번 본다. 그렇다 보니 진정한 '귀향' 느낌을 갖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난 그걸 집에 와서 TV를 봐야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은 생각보다 편안하고 소중하다. 비로소 소속감을 찾은 느낌도 있고. 원래 내가 있던 곳에 온 거니까. 내 자리는 여기니까.
특히 내가 본가에서 TV 볼 때 꼭 챙겨보는 채널이 있다. 바로 TV 홈쇼핑 4사다. GS샵, CJ오쇼핑, 현대홈쇼핑, 롯데홈쇼핑 등. 본가에 가는 주말 저녁 TV 홈쇼핑 채널은 그야말로 '패션 프로그램 전쟁'이다. 특히 토요일 밤 10시께 각사 대표 패션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새벽 1시까지 생방송으로 진행한다. 간판 프로그램인 만큼 단연 각사의 대표 쇼호스트들이 나온다. CJ는 임세영, 이민웅 쇼호스트. 현대는 김동은 쇼호스트. 요즘은 쇼호스트가 아니라도 한혜연(CJ), 김성일(GS), 김우리(롯데) 등 유명 스타일리스트도 함께 출연한다. 난 김성일 스타일리스트를 좋아한다. 스타일이 흥미롭고, 코디를 잘한다. 좋아하는 쇼호스트는 이민웅, 김동은(그나마 산 제품 보면 이민웅 쇼호스트가 판 게 은근히 있다, 청년 떡집이나 엣지 반바지 등).
난 한 채널만 보지 않고 리모컨으로 재핑하면서 여러 채널을 돌리며 본다. 그때그때 파는 상품이 다르기 때문에 매력적인 상품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다. 사실 홈쇼핑을 보면서 바로 상품을 사는 경우는 드물다. 요즘은 모바일 앱으로도 살 수 있고, 방송이 끝난 뒤에도 구매 가능하다. 물론 생방송 중에 사면 좀 더 혜택이 있을 때도 있지만. 여러 채널을 동시에 보는 이유는 꼭 상품 때문만 아니다. 말 그대로 콘텐츠를 보기 위해서다. 대표 쇼호스트의 화려한 말발도 감상하고. 우리나라 TV 홈쇼핑 채널은 굉장히 발달해 있다. 콘텐츠도 우수하다. 블랭크 같은 서비스를 통해 콘텐츠 커머스니, V커머스가 뜬다고 하지만. 난 수십 년 방송 경력을 쌓은 TV 홈쇼핑 콘텐츠 역량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특히 콘텐츠 실험은 CJ가 앞선다). 쇼호스트 언변은 물론이고.
CJ오쇼핑 패션 프로그램 '힛더스타일' 방송 화면. 사진=딱정벌레대표 쇼호스트의 진행을 들으면 감탄할 때가 많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난 그 상품을 사지 않지만. 뭐랄까. 되게 설득력 있으면서 장사치 느낌이 크게 들지 않고. 잘 아는 언니 또는 오빠가 이해하기 쉽게 상품 정보를 알려주는 친밀감도 느껴진다. 유머도 있고. 예를 들어 "이건 지구인이라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라든지. 재치 있고 재미있는 드립이어서 나도 써먹어보고 싶다. 쇼호스트는 마음을 잘 만져주는 말도 잘한다. 배우 최화정이 그렇다. 그는 쇼호스트를 오래 한 사람은 아니다. 라디오 DJ로 방송 진행 경험을 오래 쌓다가 4년 전에 자신의 이름을 건 TV 홈쇼핑 프로그램을 맡았지. 어쨌든 DJ를 오래 해선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말을 잘한다.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건 CJ오쇼핑 '최화정 쇼'에서 본죽과 특별 기획상품을 팔 때였다. 2018년 11월이었나.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아버지가 투병하실 때라 마음이 힘들던 시기였다.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왔는데 최화정 쇼에서 본죽을 팔았다. 짬뽕 맛, 트러플 죽 맛 등을 개발했는데. 그때는 그 채널에서만 살 수 있었다. 상품 장점을 열심히 홍보하는데 시식하면서 최화정 씨가 이렇게 말했다. "빈속에 커피 드시지 말고 아침에 이거 챙겨 드세요"라고. 난 그 말이 너무 와 닿았다. 아침을 잘 거르고 빈속에 커피 마시는 나라서 그렇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춥던 때라서 그런가 면식도 없는 쇼호스트의 그 말이 왜 그리 내게 위로가 되던지. 그걸 들으니 '정말 빈속에 커피 그만 마시고 아침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 TV 홈쇼핑의 상품 소싱 능력이나 배송, 반품 서비스 역량도 내겐 매력 포인트다. 밀레니얼 이하 세대에게는 스타트업 서비스가 더 호소력 있겠지만. TV 홈쇼핑 주 구매층은 40대 이상 중장년층이고, 돈도 많이 쓴다. 물론 TV 홈쇼핑은 예전처럼 고성장하는 채널은 아니다. 그들의 경쟁상대도 다른 홈쇼핑 채널이 아니라 전자상거래 업체를 포함해 모든 유통 채널. 그들도 그걸 잘 알고 있고. GS샵 같은 곳은 TV 홈쇼핑 가운데에서도 모바일 역량 강화에 빨리 대응했다. 위기의식이 크다 보니 상품도 전보다 더 좋아졌다. 한때 TV 홈쇼핑 상품은 별로라는 인식도 있었다. 요즘은 TV 홈쇼핑도 프리미엄 상품을 많이 취급하고.
자신들 채널에서만 파는 품질 좋은 단독 상품을 많이 선뵀다. 자산화 브랜드라는 표현도 쓰던데. PB 만들 듯 자신들이 직접 상품을 기획하고 제작 단계부터 유통단계까지 모두 관여해서 품질 관리한 상품이 많다. 그게 그 채널에서도 잘 팔리고(상/하반기 홈쇼핑 인기상품 10위 명단을 내곤 하는데 채널별로 보면 대체로 자산화 브랜드, 단독 브랜드가 많다). 내가 TV 홈쇼핑에서 주로 사는 제품도 이런 제품인데 가성비, 가심비 모두 충족한다. 특히 옷은 유명 스타일리스트, 디자이너와 함께 기획한 게 많아서 믿고 가는 것도 있다. 전부터 그랬지만 세트 상품을 많이 파는 것도 가성비를 높이는 요소 중 하나고.
GS샵의 패션 프로그램 '쇼미더트렌드' 방송 화면. 사진=딱정벌레아무튼 콘텐츠, 상품 만족도가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TV 홈쇼핑은 내가 좋아하는 TV 콘텐츠가 됐다. 물론 처음부터 이걸 본 건 아니다. 우리 세대도 TV 홈쇼핑 주 고객층은 아니다. 나도 어머니가 즐겨 보는 채널 정도 의미였다. 내가 TV 홈쇼핑을 챙겨보기 시작한 건 유통업계를 출입하면서부터였다. 모든 채널을 다 이용하고 알아야 하다 보니 물건도 사봐야 했고. TV 홈쇼핑은 방송도 따로 봐야 했다. 편성이 바뀌어서 어떤 유명인이 황금 시간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중요한 기사 거리였으니까. 채널 번호가 가끔 바뀌는 것도 송출 수수료나 편성 전략 관련해서 역시 중요하고.
누군가에겐 그 또한 올드 미디어겠지만 유통 출입기자 시선에서 TV 홈쇼핑은 그 어떤 채널보다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변신하려고 애쓰는 채널이었다. TV 홈쇼핑은 미래 고객인 젊은 세대를 잡아보려고 이런 노력도 하는데 난 뭘 하고 있지? 신문은 뭘 하고 있지? 그들의 실험이 부럽기도 했다. 그 정점을 찍은 건 CJ오쇼핑과 CJ E&M의 합병이었다. 주인공은 사실 E&M 쪽이겠지만. 설탕회사로 출발한 기업이 여러 실험을 꾀하면서 결국 문화기업으로 진화하고 있구나. 디즈니를 경쟁상대로 내세우고 있구나. 많은 언론이 이러쿵저러쿵 품평을 했지만 사실 언론사나 콘텐츠 기업이 가장 자극받아야 할 일이었다. 그때 어떤 T커머스 채널 관계자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솔직히 부럽죠"라고(저도 그랬습니다.ㅠㅠ).
TV 이야기를 하는데 어쩌다 보니 TV 홈쇼핑이 주가 됐다. 아무래도 내게 TV 고유 의미를 가장 크게 부여해주는 채널이라서 그런 듯하다.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TV 홈쇼핑을 보는 것.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토요일 아침에 각사 리빙 프로그램을 재핑 하듯 시청하는 거다. 사실 TV 홈쇼핑에서는 이 시간대가 또 전쟁이다. 각사 대표 쇼호스트들이 이 시간대에 간판 리빙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CJ오쇼핑에서는 배우 최민수의 부인 강주은 씨가 진행자로 나서고, 롯데홈쇼핑은 최유라, 현대홈쇼핑은 왕영은 쇼호스트가 나선다. 아무래도 먹거리나 주방용품, 생활용품을 많이 파는데 실용적이고 디자인이 예쁜 상품이 많이 나온다.
사진=픽사베이토요일 아침 시간대는 굉장히 행복한 때다. 주말에 시작되는 느낌도 들고. 아직은 주말이 많이 남았다는 기분도 좋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각 채널을 돌려보며 비몽사몽해도 기쁘기만 하다. 그러다 다시 잠들고. 방송을 오랫동안 보는 게 아닌데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굳이 토요일 아침마다 TV 홈쇼핑을 본다. 그러고 하루를 보내다가 밤에는 패션 프로그램을 보고. 이걸 주말에 집에 가서 TV로 보면 주말 느낌이 제대로 난다. 확실히 모바일 기기의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브라운관 큰 화면으로 볼 때 더 실감 난다. 속이 시원한 느낌도 들고. 어머니, 언니가 지나가면서 방송 보고 한 마디씩 하는 것도 소통하는 기분이 들어 좋다. 그렇다. 1인 가구에게 소통을, 사람을 느끼게 하는 콘텐츠다. 라디오처럼.
지난해 1월 CES 리뷰 기사를 쓰면서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TV 의미를 정리한 멘트를 접했다. 작년 CES의 주인공은 단연 LG전자의 롤러블 TV였다. 두루마리처럼 말렸다가 올라가면서 화면이 펴지는. LG 디스플레이 역량의 결정체랄까. OTT, 모바일 시대를 맞아 TV는 옛날만큼 꼭 필수적이거나 뜨거운 상품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LG 롤러블 TV는 TV가 여전히 중요한 가전제품임을 보여줬다. 브라운관 시대가 저문다고 하지만 디스플레이를 혁신함으로써 TV의 지속가능성과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다. 인공지능 비서와 접목함으로써 TV는 스마트홈의 핵심 가전이기도 하고.
조지 치폴리티스 아마존닷컴 파이어티비 인게이지먼트앤익스피리언스 디렉터가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TV는 집에서 큰 공간을 차지합니다. 거실에 주로 있고 침실 등 다른 공간에도 있죠. 가족이 앉아 있는 곳에서 (TV가) 성장하고요" TV 의미를 보여준 말. TV가 거실 중심에 있고, 가족이 이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다 사용자 접점의 정점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말이 1인 가구에게 유독 와 닿았다. 난 가족과 TV를 공유하지 않지만. 가족 간 정을 느낄 수 있는 매개로서 TV 의미가 실감 났다. 혼자라서 그게 더 공감되기도 하고. 이렇게 또 주말이 다가왔고. 언젠가 TV에 대한 생각을 글로 풀어보고 싶었다. 그걸 오늘에서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