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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 MONTBLANC


몽블랑 직원이 완성된 펜을 검수하고 있다 / 몽블랑 홈페이지


1991년 12월 25일 소련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85년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뒤 추진했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의견 충돌과 쿠데타,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때문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문서에 공식 서명을 하려던 찰나 자신이 펜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곁에 있던 당시 CNN 사장인 톰 존슨이 즉석에서 볼펜을 내밀었다. 그때 빌린 볼펜이 ‘몽블랑’ 검은색 마이스터스튁 볼펜이었다.


몽블랑.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와 가죽제품, 시계 등을 제작·판매하는 독일 브랜드다. 1906년 독일인 엔지니어인 아우구스트 에버스타인은 휴가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처음으로 펜 속에 잉크통이 들어간 만년필을 접했다. 잉크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편리함에 매료된 그는 베를린에서 똑같은 만년필을 만드는 작은 공방을 열었다. 그해부터 독일인 은행가 알프레드 네미아스가 이 제품의 수출을 돕다가 이듬해 요하네스 포스, 막스 코흐를 만년필 사업의 투자자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함부르크에 회사를 설립해 1909년 ‘루주 에 누아(Rouge et Noir)’라는 이름의 만년필을 생산했다. 만년필 아래쪽은 검은색, 뚜껑의 끝부분은 붉은색이라 일명 ‘빨간 모자’로 불린 이 만년필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제목에서 착안해 이름 붙인 것이었다.



몽블랑 헤리티지 루즈 앤 느와 2017년 에디션 / 몽블랑 페이스북



필기구 분야 최초·최고의 기록 명성


1910년 세 명의 신사는 알프스산맥의 유럽 최고봉에서 따와 회사명을 몽블랑으로 바꿨고, 몽블랑 정상을 덮고 있는 만년설의 결정체를 모티브로 해 흰 육각형 로고의 화이트 스타 엠블럼을 상표 등록했다. 처음으로 몽블랑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같은 이름의 펜을 출시했던 당시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몽블랑의 투자자 중 한 명인 요하네스 포스가 자신의 사촌과 사업 이야기를 하다 ‘최고의 품질과 꼼꼼한 장인정신’을 몽블랑산에 비유한 것이 브랜드의 기원이 됐다.



이후 몽블랑은 필기구 분야에서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내놓으며 명성을 높여갔다. 1914년 최초로 펜 헤드 부분에 몽블랑 로고를 새긴 만년필을 출시했고, 10년 뒤엔 펜촉 제조공장을 인수해 금·백금으로 만든 ‘마이스터스튁’을 출시하면서 고급 만년필 제조업체로 자리 잡았다. ‘걸작’을 뜻하는 독일어 표현처럼 마이스터스튁을 비롯한 몽블랑의 필기구에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몽블랑 만년필의 펜촉에 쓰인 4810이란 숫자는 몽블랑산의 높이를 의미하는데, 1930년부터 새기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몽블랑은 가죽제품 제조사인 오펜바흐를 인수해 필기구를 넣는 보관함과 가방 등의 제품까지 제작하면서 사업 확장에 나섰다. 그리고 1952년, 오늘날까지도 몽블랑 만년필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는 마이스터스튁 149가 처음 출시되었다. 가장 유명한 만년필이자 처음 출시된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생산되는 제품이기도 하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레드 골드 149 만년필 / 몽블랑 홈페에지


그러나 몽블랑에도 시련은 있었다. 시장의 흐름이 빠르게 바뀐 것이다. 1959년 프랑스에서 출시된 ‘빅(Bic)’ 볼펜은 몽블랑뿐만 아니라 모든 고급 펜 제조업체를 큰 위기로 몰아넣었다. 빅 볼펜은 출시 당시 0.19달러에 불과해 이전까진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저렴한 가격이었다. 게다가 만년필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최신 기술이 적용됐다. 몽블랑은 1960년대 들어 볼펜의 모양을 본떠 만든 닙을 넣은 만년필을 만드는 등 온 힘을 다했지만 결국 1985년에 이르면 경영악화 끝에 영국의 알프레드 던힐사에 인수되고 만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소유 관계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쳐 명품 브랜드를 다수 보유한 스위스의 리치몬드 그룹 산하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현재는 필기구와 가죽제품을 포함해 향수·보석·스마트 시계 등 다양한 상품군을 전 세계 9000여 개의 매장에서 판매하는 브랜드로 정착했다.


그런데 몽블랑을 이른바 ‘럭셔리 브랜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몽블랑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던 단초도 여기에 있다. 몽블랑의 만년필과 필기구, 시계, 가죽제품은 모두 어느 정도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고는 있지만 고가의 명품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닌 브랜드로 시장에서 인식된다. 한편으론 어정쩡한, 다른 한편으론 전략적인 몽블랑의 위치는 ‘개인의 취향’이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몽블랑은 단순히 물 건너온 명품이라서 인정받는 대신 고객이 감정적·심리적으로 가치를 느끼는 소비를 할 수 있게 제품을 만들어 판다. 여행을 예로 들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값비싼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고 고급 숙박업소에서 질 좋은 서비스와 음식을 맛보는 것이 단순히 과시적 소비만은 아닌 것과도 같다. 이따금 스스로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추억할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큰마음 먹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몽블랑 매장 전경



펜촉 하나 만드는 데 152가지 공정



사실 품질을 위한 몽블랑의 노력은 여느 럭셔리 브랜드 못지않다. 가령 펜촉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무려 152가지의 공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만년필 한 자루가 완성되기까지 약 6주의 시간이 소요된다. 지금도 독일 함부르크의 펜촉 제조공장에는 35명의 전문 기술자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천천히 펜촉 만드는 공정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펜촉에 붙이는 작은 금속 알갱이인 팁(tip)은 종이와 맞닿는 부분으로 필기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품이기 때문에 용접된 팁의 문제점을 전문적으로 확인하는 기술자가 늘 불량을 철저히 검수한다. 이러한 몽블랑 필기구의 완성도와 내구성 덕에 가까운 문구점에서 볼펜을 살 수 있음에도 어떤 소비자들은 기꺼이 몽블랑을 찾는다. 몽블랑이라는 브랜드가 생활을 좀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가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몽블랑 만년필 및 펜촉 전문가 Axel Nier (악셀 니어) / THE STRAIGHT TIMES 참조



필자도 몽블랑의 필기구 몇 개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이름값만 보고 산 적은 없다. 막상 생각을 글로 옮기려고 보니 내 글쓰기 능력의 한계를 극명하게 느낀 경험을 한 적이 있었고, 또 글로 써야 내가 어디까지 명확하게 알고 있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이 정리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새로운 창의성을 발현하려면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생활 속의 노력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고의 ‘무기’를 가진다면 글쓰기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그것이 몽블랑을 선택한 결정적 계기였다.



저마다 다른 개인의 취향에 맞춰 몽블랑은 오랫동안 변화를 만들어오고 있다. 이들은 가격 아니면 품질, 한 가지 무기만으로 승부한 적이 없다. 일부 고가품을 제외하면 몽블랑은 가격과 품질 모두를 만족하는 ‘가성비’에 충실한 보편적인 제품을 생산해왔다. 모든 제품군에서 입문자용 모델을 적절히 판매에 활용한 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점진적으로 더 정교한 제품을 고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전략은 몽블랑을 100년 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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