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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LOUIS VUITTON


트렁크를 비롯해 각종 여행용 가방을 모아 선보인 루이뷔통의 화보. / 루이뷔통 페이스북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호는 기념비적인 첫 운항에 나섰다.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난 이 대형 호화 여객선은 프랑스와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수많은 명사를 포함한 승객과 승무원 등 총 2200명 이상이 몸을 실었다. 타이타닉호는 20층 건물 높이에 길이 269m, 너비 27.7m로 지금의 유람선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당대 최고·최대의 배였다. 당시 첨단기술을 집약시켜 최대 4개의 구획이 침수돼도 견딜 수 있도록 건조했다. 그러나 ‘신도 침몰시키지 못할 불침선’이라고 불린 이 배는 출항한 지 나흘 만인 4월 14일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그런데 침몰한 배에서도 침수되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져 유명해진 물건이 있었다. ‘루이뷔통’의 여행용 트렁크였다. 생존자들 가운데 일부가 바다 위에 떠 있던 루이뷔통의 트렁크를 부여잡고 버텼고, 침몰한 지 수십 년이 지나 배를 인양해보니 선체에 남겨졌던 루이뷔통의 트렁크도 전혀 침수되지 않아 당시의 짐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사실 이 에피소드의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루이뷔통이 지니고 있는 명품 브랜드로서의 가치가 100여 년 전에도 인정받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타이타닉호의 일등석 요금은 현재 가치로 따지면 6000만원가량 되는 고액이었다. 이 배를 탈 수 있던 부유한 탑승객들이 루이뷔통을 애용했다는 점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침몰한 타이타닉에서 건진 여행용 가방


오늘날에도 루이뷔통의 입지는 여전히 굳건하다. 지난해 발표된 ‘글로벌 100대 브랜드’ 순위에서 루이뷔통은 17위를 차지했다. 경쟁 브랜드인 샤넬이나 에르메스보다 더 높은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셀린느·겐조·지방시 등의 최고급 패션 브랜드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LVMH그룹 소속으로, 2018년 기준 연매출 59조5000억원을 기록한 LVMH그룹에서 루이뷔통이 매출의 약 25%, 영업이익의 절반을 창출해 냈다.


루이뷔통은 핸드백·가죽소품·액세서리·신발·의류·주얼리 등 다양한 상품 카테고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여행가방을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창업자 루이뷔통의 개인사가 브랜드의 방향을 결정지은 셈이다. 목공소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재혼하자 루이뷔통은 13세에 가출했다. 그리고 2년간의 방랑 끝에 470㎞를 걸어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로 오는 길에 귀족 부인들이 수십 벌의 드레스를 담은 나무상자를 마차에 싣고 다니던 모습을 목격했다. 그때부터 가볍고 튼튼한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겠단 생각을 시작했다.


1837년 파리 생제르맹 인근 가방 제조 공방의 견습공이 된 그는 당시 생제르맹과 파리 사이의 철도 노선 공사를 보면서 앞으로 마차보다 철도 여행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직감했다. 1839년 파리와 베르사유 사이에 철도 노선이 생겨 왕궁 여행이 가능해지자 그는 색다른 가방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여행가방이 반원형 뚜껑을 달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단단한 재질의 나무로 만들어져 이동성이 불편하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1858년 루이뷔통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기차 여행에 최적화된 여행용 트렁크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를 선보였다. 기차의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가방을 적재할 수 있도록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재질을 사용했다. 어릴 적 목공 경험을 바탕으로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구조를 개발했고, 캔버스 천에 풀을 먹여 방수 처리를 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매장을 연 지 4년 만의 일이었고, 기차를 처음 구경한 지 21년 만이었다.


이 트렁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같은 유명인들이 애용하면서 히트 상품이 되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1883년부터 파리~이스탄불을 오간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일등 침대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제품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가 히트 상품이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유명인들이 주로 사용하다 보니 강도들의 표적이 되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뷔통은 그의 아들 조르주와 함께 텀블러 자물쇠를 달아 고유의 잠금 시스템을 선보였다. 또 늘어나는 모조품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베이지색과 갈색의 바둑판무늬로 형성된 ‘다미에 캔버스’를 출시했고, 이마저 모조품이 생겨나자 지금도 루이뷔통 하면 떠오르는 ‘모노그램 캔버스’를 공개했다. 루이뷔통의 이니셜인 ‘L’과 ‘V’를 비스듬히 겹치고 아르누보 양식에서 영감을 얻어 꽃과 별 문양을 번갈아 배치한 바로 그 패턴이다.



교통수단 발달에 맞춰 선보인 가방들 


이후 선박 여행 시대가 열리자 루이뷔통은 장기간의 여행을 위해 세탁물을 보관할 수 있는 ‘스티머백’, 옷을 세워 보관할 수 있는 ‘워드로브 트렁크’뿐만 아니라 둥근 원통형의 여행용 가방 ‘스피디백’ 등을 출시했다. 이중 스피디백은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거리에서 3초마다 한 번 마주칠 정도라 ‘3초백’이란 별명이 붙은 핸드백의 원형이다. 이들은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라 바뀌는 여행의 모습을 꾸준히 파악하면서 변화에 발맞춘 여행용 가방을 잇달아 선보여 왔다.


그리고 그 바탕엔 변하지 않고 완벽한 품질을 추구하는 고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루이뷔통의 전 제품은 전속장인이 손으로 가죽을 자르고 틀을 만들어 징을 박는다. 30일 동안 무두질을 거친 천연 가죽은 8번의 품질검사를 거친 후에야 재료로 쓰일 수 있다. 또한 ‘최첨단 고문실’이라 불리는 실험실에선 3~4㎏짜리 돌멩이를 채운 가방을 나흘 동안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방망이로 두들긴다. 변색되는지를 확인하려 자외선을 집중적으로 쬐게 하거나 지퍼의 견고함을 살펴보기 위해 5000번 이상 열었다 닫았다 하는 공정도 포함된다.


값비싼 명품 브랜드의 제품이라면 당연히 루이뷔통처럼 품질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각도에서 루이뷔통처럼 우수한 품질 보증을 위해 노력하는 브랜드는 매우 찾기 어렵다. 특히 아웃소싱을 주지 않는 점에선 독보적이다. 루이뷔통은 창업 후 166년이 지난 지금도 하청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지 않는다. 품질을 위해 본사에서 매장을 100% 관리하고 공장 기술자들 또한 많게는 수년씩 선임 기술자들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는다.


마차로부터 철도, 여객선을 거쳐 항공 여행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이들은 여행객들과 함께해 왔다. 품질과 패션의 최전선에서 그들만의 여정을 이어온 것이다. 완벽을 지향한 그들의 시도는 어쩌면 창업자가 겪었던 고난과 희망의 여행 경험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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