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상품은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넘어 그 상품을 소유한 사람의 삶과 가치관을 나타내는 척도가 됐다. 따라서 소비자의 관심도 얼마나 고가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상품을 효율적으로 구매하고 활용할 수 있는지로 변하고 있다. 또한 소비자들은 상품 이면의 가치까지도 주목하게 됐다. 즉 상품의 기능·디자인·재미 등 눈에 보이지 않게 만족도를 높이는 지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브랜드가 얼마나 다양한 활동을 선보이는가가 구매의 척도가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당 분야 ‘최초의 브랜드’가 시장에서 지닌 선도적인 입지를 바탕으로 한 힘은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렵다. 또한 소비자들 가운데서도 새롭고 혁신적인 상품을 앞장서 구매하는 얼리 어답터와 이후 그들을 뒤따르는 후발 소비자들을 구분하는 도식도 흐릿해졌다. 특히 스스로 상품 개발에 참여하고 이를 전파하는 것에 익숙해진 포스트 디지털 세대가 등장하면서 과거의 ‘마케팅 불변의 원칙’은 이름조차 무색할 지경이다. 수많은 브랜드도 단순히 ‘미투 전략’으로 1등 기업을 쫓아가는 식으론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브랜드 전략, 그중에서도 특히 브랜드 스토리를 구축하는 일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올해 창업 100주년을 맞은 모자 전문 제조기업 ‘뉴에라 캡 컴퍼니’도 강력한 브랜드 스토리를 바탕으로 승부하는 곳이다. 1920년 독일계 미국인인 에르하르트 코흐가 설립한 이 기업의 대표 상품은 야구 모자다. 설립 초기에는 신사용 모자 등을 만들어왔던 이들이 스포츠, 그중에서도 모자를 쓰는 독특한 스포츠인 야구와 만나 뉴에라만의 브랜드 스토리를 써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의 야구 모자와 가까운 최초의 모습은 1860년대 아마추어 야구팀 브루클린 엑셀시어즈가 처음 선보였다. 경기 중 모자가 잘 벗겨지지 않고 둥근 머리에 잘 맞도록 제작되었고,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모자의 챙이 앞부분에만 있었다. 그러나 다소 느슨한 디자인 때문에 착용감이 불편했고, 모자가 빳빳한 형태가 아니어서 팀의 로고가 잘 보이지 않았다. 뉴에라는 이런 상황에서 1934년 미국 메이저리그(MLB)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팀을 위해 최초로 선수용 야구 모자를 공식 제작·공급하기 시작했고, 1965년부터는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팀에 야구 모자를 공급해왔다.
뉴에라의 야구 모자가 이목을 끌게 된 시기는 1950년대부터였다. 1950년 창업자 에르하르트 코흐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해럴드는 모자의 착용감을 높이고 팀의 로고가 돋보일 수 있게 품질 개선에 집중했다. 그 결과 1954년 현재까지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쓰고 있는 모델인 ‘59피프티(59FIFTY)’ 모델이 나왔다. 이 모델은 모자의 크기를 조절하는 기능은 없지만 세분화된 사이즈로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선택할 수 있다. 또 6개의 천을 이어 머리를 덮는 크라운 부분은 조각마다 통풍을 위한 구멍을 내서 땀 배출이 쉽게 했다. 모자 앞부분 로고가 박히는 부분에는 독특한 버크램 소재를 더해 팀의 로고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뉴에라는 마침내 1993년 메이저리그 전 구단의 선수용 모자를 공식적으로 납품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자의 기능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울로 제작하던 겉면과 모자 안쪽을 통기성 높은 폴리에스터 소재로 대체했고, 이마에 닿는 밴드 부분도 관리가 쉽도록 검은색으로 변경했다. 또한 햇빛과 경기장 잔디에서 반사되는 빛으로부터 선수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챙의 안쪽 면 또한 검정으로 제작하는 등 품질과 혁신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브랜드답게 끊임없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기간 만들어온 브랜드 스토리는 뉴에라가 경기장을 벗어나 소비자들에게도 창의적인 인상을 연결하는 밑바탕이 됐다. 특히 스포츠광으로 알려진 뉴욕 출신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에게 빨간색 뉴욕 양키스 모자를 만들어주기 시작하며 범위가 한정된 팀 컬러에서 벗어나 다양한 컬러와 무늬를 접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다양한 힙합 음악인이나 예술가들에게서 뉴에라에 자신만의 모자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모자챙에 붙어 있는 사이즈 표기 스티커를 떼지 않고 쓰는 착용법이 일반화된 것도 뉴에라 모자를 힙합 문화와 접목한 역사가 오래되면서 정착된 일이다.
이후 뉴에라는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전미농구협회(NBA), 내셔널풋볼리그(NFL) 등 다양한 인기 스포츠 리그를 아우르며 스포츠 업계에서 신뢰받는 브랜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팀 로고가 새겨진 모자는 팬들의 생활 속 문화 아이콘으로 확장되면서 뉴에라 모자는 응원하는 팀에 대한 소속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소비자 개인의 창의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상징으로도 자리 잡았다.
100년 동안 구축해온 오리지널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품질의 혁신을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온 뉴에라의 브랜드 스토리는 오늘날 헬무트 랭, 요지 야마모토, 리바이스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다양한 디자인과 착용감을 제공하는 모자를 내놓는 쪽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나라별 이슈와 스토리를 더한 로컬 상품을 내놓으며 모든 소비자가 자신만의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제품도 선보이고 있다.
뉴에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브랜드 스토리란 비단 소비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 브랜드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기업의 임직원들, 즉 내부 소비자들이 미래의 경영전략 방향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이끌어내는 데도 브랜드 스토리는 큰 영향을 준다. 결국 하나의 전략으로 시작된 브랜드 스토리는 해당 브랜드의 강점을 극대화하고 상대와 맞설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핵심적인 운영체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소비자를 자연스럽게 팬의 지위로 격상시킴으로써 응원하는 팀뿐 아니라 스포츠용품 공급자인 뉴에라에도 자발적인 애정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이들의 전략은 끊임없는 품질 개선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 개발 덕분에 성공적일 수 있었다. 새로운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차별화하기가 더욱 어려워져만 가는 시대, 다른 기업이나 브랜드가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브랜드 마케팅을 넘어 우리네 평범한 삶에도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