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박스오피스 역대 1위, 세계 최초·최단 기간 관람수익 20억달러 돌파, 최종 관람수익 28억달러 돌파. 2019년 4월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세운 기록이다. 세계 최초로 개봉된 국내에선 개봉 당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사전 예매로만 200만 관람객을 동원하면서 역대 외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슈퍼히어로들이 중심이 된 영화가 잇따라 흥행에 성공하며 세계 최고의 영화 제작사로 떠올랐다. 마블코믹스 만화 작품들을 원작으로 구성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세계관을 따라 현재까지 총 24편의 영화가 나왔다. 아이언맨을 비롯해 헐크, 토르, 스파이더맨 등 여러 슈퍼히어로가 각각 또는 함께 나오는 마블의 영화들은 지금까지 크게 세 가지의 ‘페이즈(Phase)’라고 불리는 스토리라인으로 구분됐다. 첫 번째 페이즈는 2008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한 영화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인크레더블 헐크>, <토르: 천둥의 신> 등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나온 두세 번째 페이즈는 각각의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구축했고, 결국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갈 것임을 예고했다.
향후 네 번째 페이즈에서는 <블랙 위도우>나 한국 배우 마동석의 출연으로 세간에 잘 알려진 <이터널스>, 그 밖에 스파이더맨과 토르의 새로운 시리즈 등 총 6편의 차기작이 준비되어 있다. 극장판 영화 외에도 OTT 서비스 업체인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단독 방영되는 <완다비전> 등의 TV 드라마 시리즈도 예정된 상태다.
이들 영화 중 특히 <어벤져스> 시리즈는 마블이 제작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나와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고 다양한 이야기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시도였다. 각 히어로를 하나의 브랜드라고 보면 브랜드를 모으고 엮어서 더욱 그럴듯하고 매혹적인 대형 브랜드를 만들어낸 셈이다. 마블은 시간대에 따라 페이즈를 구분하는 한편, 각 페이즈에 포함된 영화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확장했다. 개별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내러티브 세계로 구성하는 새로운 문화적 컨버전스의 결과물로 탄생한 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 월드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란 개념은 미국의 미디어 학자 헨리 젠킨스 MIT 교수가 저서 <컨버전스 컬처>를 통해 미디어 간의 물리적인 결합에 더해 ‘콘텐츠 역시 미디어 사이를 이동(trans)한다’는 특성을 지목한 뒤로 점차 확산되었다. 이때 콘텐츠는 단순히 미디어 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콘텐츠의 성격에 맞게 다른 스토리를 개발시킨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공유하되 개별 콘텐츠가 지니고 있는 핵심 내용은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개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가령 <어벤져스>의 세계관에선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아이언맨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후 헐크가 등장해 또 하나의 슈퍼히어로 콘텐츠가 추가되면서 이야기의 배경이 확장된다. 천둥의 신 토르는 그가 활동하는 아스가르드라는 우주의 공간까지 끌어들여 공간의 범위도 넓힌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비밀 프로젝트에 자원해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가 57년 후 대서양에서 발견된 캡틴 아메리카가 출연하며 시간적 배경은 과거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어벤져스>의 스토리월드에 합류함으로써 빌런(악당)인 로키와 치타우리 종족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려는 다양한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알려진다.
게다가 <어벤져스> 시리즈는 각각의 슈퍼히어로뿐 아니라 ‘쉴드’라고 불리는 조직에서 활동하는 닉 퓨리, 블랙 위도우, 호크 아이 등의 조연급 캐릭터도 등장시키면서 이들 또한 독자적인 세계관과 스토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들이 나오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인과적인 부분은 <에이전트 오브 쉴드>라는 드라마를 통해 추후 보충된다. 전체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수준의 개별 콘텐츠를 탄생시키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마블과 쌍벽을 이루는 DC코믹스도 비슷한 시도를 해왔다. 2013년 슈퍼맨 시리즈인 <맨 오브 스틸>을 개봉하는 등 개별 슈퍼히어로를 다룬 영화와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함께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며 마블을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이들의 개별 슈퍼히어로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넘어서지 못했고, <배트맨 vs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야심 차게 준비했던 영화들도 마블과 달리 흥행에서 이렇다 할 높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DC코믹스의 실패는 브랜드의 관점에서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스토리 속에서도 시공간 배경이 확장되거나 다양한 캐릭터가 출연하긴 한다. 하지만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개념, 즉 전체 세계관은 공유하되 개별적인 핵심 내용은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고 새로운 수준의 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DC는 과거에 이름 높았던 개별 캐릭터에 그대로 의존했기 때문에 스토리의 배경과 구성이 그리 넓혀지지 않았다. 과거의 명성에만 의존하고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해 시장에서 잊히고 마는 브랜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바로 독자나 관객의 경험을 기반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마블의 세계관에 따라 시공간을 오가며 종횡무진 연결되는 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고, 이후 드라마를 통해 세부적인 개연성을 재차 확인한다. 또한 온라인 웹사이트를 통해 팬들끼리 상호교류를 하면서 궁금한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마치 퍼즐을 풀어가듯 캐릭터의 성격과 이후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단서들을 얻는다. 여기에서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넘어 관객이 참여하고 경험하는 기회가 생긴다.
마블은 2008년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 이래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표한 총 24편의 영화로 하나의 거대한 영화적 세계관을 정립했다. 비록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해당 세계관을 이끌던 중심축인 아이언맨이 사망했지만, 스파이더맨이 그 바통을 받는 것으로 그려지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을 시작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또 한 번 준비하고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공방을 거듭해온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블의 모회사인 디즈니가 20세기폭스를 인수하면서 별도의 세계관으로 그려지고 있던 <엑스맨> 시리즈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필자를 포함해 마블의 팬들이 느꼈던 흥분과 감동 그리고 그리움은 또 다른 세계관과 스토리를 통해 보다 더 다양하게 보상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