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Braun)’은 올해로 창업 100주년을 맞는 독일의 소비재 브랜드이다. 1921년 엔지니어였던 막스 브라운이 라디오용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뒤 라디오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브라운은 1950년대 들어 회사의 사업 방향을 종합 가전제품 제조·판매로 확장하고 우수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기능적인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여 독일의 현대적 산업디자인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브라운의 제품을 보고 있노라면 아연실색하고 만다. 한때 최고의 종합 가전업체였다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제품은 특색이 없다. 브라운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종의 ‘브라운다움’, 즉 이를테면 간소하면서도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외관과 제품의 본질에 충실한 기능성 등 기능적 디자인에 충실했던 브랜드였기에 이런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당시의 ‘브라운스러운’ 제품들은 기능적 디자인과 장식적 디자인을 조화시킨 대표적 사례였다. 1960년대 들어 텔레비전이나 턴테이블 등의 가전기기가 신분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부각되자 브라운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으로 금속과 플라스틱 등의 소재를 선택하는 동시에 혁신적인 디자인을 가미해 장식적 디자인에도 정성을 들였다. 이러한 모습은 ‘굿디자인’의 표준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 세계적인 디자인 이론가인 데얀 수직이 “바우하우스의 강의실에 있어도 손색이 없는 고매한 브라운 제품들이 역사와 운명의 장난으로 쇼핑몰에 떨어졌다”며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창출했다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디터 람스(Dieter Rams)는 바로 이 시기 브라운의 전성기를 이끈 수석 디자이너였다. 그 스스로가 브라운다움을 이끌어낸 인간 브랜드 자체다. 그는 재스퍼 모리슨, 후카사와 나오토 등 현대 산업디자인 역사에서 굵직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들이 존경하는 최고의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특히 애플의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아이브는 자신의 디자인 영감을 람스에게서 받았다고 공공연하게 밝힐 정도였다. 애플이 1세대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브라운 계산기 ‘ET44’를 빼닮은 계산기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한 것도 람스에 대한 일종의 헌사였다.
193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비스바덴에서 태어난 그는 목수 기능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유년을 함께 보내면서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듬게 됐다. 갖은 도구와 연장을 손에 익힌 덕분에 고향의 예술대학으로 진학한 그는 이론 중심이던 대학 강의에 회의감을 느껴 잠시 학업을 중단했지만 이내 건축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건축 사무소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1955년 그는 브라운과 운명적으로 조우했다. 당시 브라운 창업자 막스 브라운의 아들인 아르투로와 에르빈 형제가 울름 조형대학과 진행하던 협업 활동에 매력을 느낀 람스는 이직을 결심, 마침내 브라운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합류했지만, 이듬해 본격적으로 제품 디자인에 참여한 뒤로 무려 40년 동안 브라운 디자인 스튜디오를 이끌었다. 오디오 시스템부터 계산기, TV 등 가전 전 분야에 걸쳐 평범하지만 비범한 제품들을 디자인한 것이다.
그의 디자인 세계관은 ‘Less but Better(최소의 디자인이 최고의 디자인)’라는 말로 축약된다. 이는 그가 2008년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발표했던 디자인 10계명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디자인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서술했을 뿐이다. 즉 굿디자인을 위한 기능적·장식적 디자인 간 조화도 중요하지만 결국 디자이너의 윤리적 사명감이 소비자에게 제품의 올바른 용도를 다시금 일깨워주며 진정한 소비 가치를 실현할 수 있게 한다고 믿은 것이다.
람스가 브라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시대에는 가전제품이 기술적으로 보완될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제품을 쓰면서 일상적으로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이런 불편을 개선하고자 하는 수요에만 부합해도 신제품들이 잘 판매되던 환경이었다. 따라서 기업 입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마케팅 전략을 펼치면 람스가 오랜 시간 동안 공들였던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는 굳이 큰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기능과 사양을 갖춘 제품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생활의 불편함을 크게 개선시킨데다 가격 또한 합리적인 수준에서 구매할 수 있다. 비록 람스의 윤리적 사명감이 위대하게 느껴진다고는 해도 소비자가 지향하는 일반적인 소비 패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그가 꿈꿨던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를 놓치지 않았다. 한층 더 나은 제품들이 양산되는 시대에도 늘 같은 방식으로 ‘조금 더 올바른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조금 더 가치 있는 소비’는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브라운다움으로 승화돼 오늘날까지 브랜드의 명성을 기억하게 한다.
브라운다움을 체현한 제품을 몸소 느낀 적이 있다. 빈티지 오디오를 수집하는 필자의 한 지인이 독일의 온라인 경매 사이트까지 뒤져가며 디터 람스가 초기에 디자인한 전축을 구입한 경험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제품을 구입한 것보다 람스의 철학을 유지하고 계승할 기회를 얻어 좋았다”는 그의 소회는 그 제품을 본 필자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1956년 브라운 역사상 최초로 투명 아크릴 뚜껑을 사용한 이 전축은 당시 경쟁사들이 ‘백설공주의 관’이라고 폄하했던 ‘SK4’ 모델이다. 브라운 산업디자인팀을 이끌던 한스 구겔로트와 함께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람스는 당대의 유행에 반하는 디자인을 내놓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 60여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참고로 브라운의 전성기로 1950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로 꼽았는데 이는 브라운이라는 회사의 명운과도 연관이 있다. 브라운은 현재 미국의 다국적 기업 ‘프록터 앤 갬블(P&G)’의 자회사가 됐다. 람스가 지향한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회사다. 결국 람스는 브라운을 떠났고, 모기업은 람스가 남긴 히트 제품을 골라 새롭게 판매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한때 브라운이란 브랜드를 정상으로 이끈 디터 람스라는 휴먼 브랜드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