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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포이즈 Anglepoise


앵글포이즈 1970's 모델 90 MINI (출처 : 앵글포이즈 홈페이지)


예전에 한 빈티지 상점에 들른 적이 있다. 많은 물건 중에 유독 낡은 조명 스탠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전기 플러그는 깨져 있었고, 조명은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제품이었지만 ‘굿디자인’이란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값을 치렀다. 1970년대에 생산된 이 ‘앵글포이즈(Anglepoise)’ 스탠드는 필자가 오랫동안 사고 싶어했던 제품이다. 앵글포이즈라는 브랜드 이름만 들으면 생소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의 영화 도입부에서 픽사 로고에 나오는 스탠드의 원형이 앵글포이즈라 하면 쉽게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먼저 브랜드의 평판을 좌우하는 대표적 요소 가운데 하나인 디자인, 그중에서도 ‘굿디자인’이란 무엇인지부터 짚고 가보자.




쉽게 각도 조절하는 조명 스탠드


굿디자인이란 용어는 우수한 기술력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의 ‘성능 디자인’과 이를 돋보이게끔 만드는 차별화된 제품의 ‘장식 디자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소비자는 뛰어난 성능을 미려한 디자인으로 실현하는 굿디자인 제품을 구매할 때는 물론 실생활에서 사용할 때 무형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두고두고 볼 때마다 흐뭇한 기쁨을 준다는 점이 굿디자인 제품의 가치다.

Dyson V11 코드리스 진공 클리너 (참조 : 다이슨 홈페이지)


좀 더 직관적인 예로 강력한 흡입력으로 유명한 ‘다이슨’의 진공청소기가 있다. 강한 원심력을 이용해 먼지와 공기를 분리하는 사이클론 기술을 적용한 이 청소기는 다이슨의 창업자이자 수석 엔지니어인 제임스 다이슨이 무려 5127개의 시제품을 생산한 끝에 개발됐다. 그는 여러 기업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스스로 창업하기로 했고, 제품은 출시된 지 18개월 만에 영국 청소기 시장 1위를 달성하며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다.


이 신제품이 히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다이슨의 청소기는 사이클론 기술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로 성능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먼지봉투를 없앨 수 있었다. 또 이 성능을 소비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향상된 청소능력을 체감할 수 있도록 먼지와 공기가 분리되는 부분을 투명하게 만든 장식 디자인으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앵글포이즈의 역사도 굿디자인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돼 있다. 1931년 영국의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조지 카워다인은 부친이 개발한 스프링과 크랭크, 레버를 사용해 무게 균형에 대한 이론적 개념을 정립했다. 1년 뒤 그는 이 이론을 기반으로 차량 서스펜션을 개발하던 도중 사람의 팔처럼 각도를 쉽게 조절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조명 스탠드를 고안했다. 그는 금속 스프링 제조사인 허버트 테리에서 출시된 스프링을 활용한 스탠드를 개발했고, 특허를 취득해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앵글포이즈를 개발한 조지 카워다인


앵글포이즈의 성능 디자인에서는 스프링이 핵심 역할을 한다. 최초 모델인 ‘1208’은 네 개의 스프링이 가벼운 압력만으로도 램프의 위치를 조정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한 손가락 힘만으로도 조명을 위로 끌어올리거나 아래로 내릴 수 있게 부드럽게 작동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제품은 있었지만 앵글포이즈는 장력이 뛰어난 스프링을 사용해 독보적이었다. 또 60와트짜리 텅스텐 전구는 수직이든 수평이든 원하는 지점에 정확한 각도로 빛을 밝혀줄 수 있었다.

앵글포이즈 1227 데스크 램프 (참조 : werd.com)



이후 앵글포이즈는 1935년 1227개의 시제품 생산 테스트를 거쳐 세 개의 스프링만으로 구성된 스탠드를 새롭게 출시했다. 지금까지도 동일한 디자인으로 생산하고 있는 ‘1227’ 모델이다. 영국 내수시장을 겨냥해 개발한 이 제품은 오랜 기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2009년에는 영국 우정국이 선정한 ‘영국을 대표하는 10대 디자인’ 중 하나로 펭귄북스 커버와 이층 버스 등과 함께 뽑혀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10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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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영국을 대표하는 10대 디자인 우표 (출처 : 앵글포이즈 홈페이지)


사실 초기 앵글포이즈의 제품은 공학적이고 실용적인 성능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장식 디자인 면에서는 완벽하다고 볼 수 없었다. 계단식 형태로 만들어진 무거운 받침대는 투박했고, 뼈대처럼 보이는 움직이는 스프링 암은 수수하게 보였다. 또한 초기엔 공장 등 산업현장에서 쓰일 것을 염두에 두고 전선을 직물로 엮어 밖으로 노출했고 스위치도 시중에 나와 있던 기성품을 사용해 다른 부품과는 이질적이어서 전반적으로 조잡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산업용으로 나온 스탠드가 에너지 절약형이고 다각도로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가정에서 더 활발히 쓰이게 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앵글포이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스프링의 장력을 활용해 자유자재로 위치를 조정하고 유지하는 스탠드라는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앵글포이즈의 스탠드가 세상에 나오고 나서부터는 스프링과 크랭크, 레버의 조화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디자인 잡지 ‘도무스’ 편집장과 런던 디자인뮤지엄 관장을 역임한 데얀 수직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에 속하는 제품”, 즉 당시로선 새로운 형태였음에도 보는 즉시 어떤 용도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는 점이 앵글포이즈 디자인의 정수였던 셈이다. 이후 출시된 대부분의 스탠드는 이 기술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했기에 결과적으로 앵글포이즈는 스탠드라는 하나의 범주를 낳은 시초가 됐다.


영국의 패션디자이너 폴 스미스가 디자인한 앵글포이즈 Type 75 


한편 앵글포이즈는 모델 ‘1227’을 출시한 이후 여러 작은 세부적인 설계 사항을 추가하면서 지속적인 개선을 이뤄내고 있다. 2003년엔 영국 고속열차 인터시티 125 등을 디자인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케네스 그리인지를 디자인 디렉터로 초빙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스탠드를 출시했고, 마가렛 하웰, 폴 스미스 등 유명 패션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서도 전통적인 기능과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다양하게 접목하고 있다. 기능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 그리고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끝없는 진전, 이것이야말로 앵글포이즈가 보여준 디자인의 가치다.


이 글을 쓰기 전 앵글포이즈 스탠드의 스위치를 켜고 조명이 적당한 곳에 놓일 수 있도록 한 손가락으로 위치를 잡았다. 텅스텐 전구는 필자가 원하는 정확한 방향에 빛을 겨누었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쓰기 전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도 굿디자인을 갖춘 제품이 주는 여유 덕분은 아닐까. 실제 생활에서 기쁨을 주는 도구로서의 가치,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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