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푸아시(Poissy)는 파리에서 기차로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다. 북쪽으론 부르고뉴에서 노르망디를 거쳐 영국해협으로 빠져나가는 센강이 흐르고 남쪽으론 중세부터 왕과 귀족들의 사냥터로 쓰인 생제르맹 앙 레 숲이 있어 예로부터 별장이 많았다. 1931년 이 도시에 특이하게 생긴 집 한 채가 들어섰다. 가느다란 여러 개의 기둥 위에 직사각형 상자가 아슬아슬하게 얹힌 형태다. 순백의 외관에 군더더기 없는 형태를 띠고 있어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곤 하나, 사람들은 장식 하나 없는 이 집을 보고 의아해했다. 푸아시에 있던 기존의 별장이나 작은 수도원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빌라 사보아. 이 건물의 이름이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이자 그 스스로가 건축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된 스위스 출신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대표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주택에 최적화된 건축 디자인과 양식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건축의 5원칙을 소개했다. 빌라 사보아는 그가 제창한 이 5원칙, 즉 필로티와 옥상정원, 개방형 평면공간, 수평창, 자유롭게 설계한 정면부 등 다섯 가지를 고스란히 적용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근대 건축의 5원칙>
1. 필로티 :
기둥으로 건물을 띄우기 위해 만든 공간. 사람도 바람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동선 구성
2. 옥상정원 :
눈이나 비를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 구배 지붕으로 덮여 있던 기존 건물과 달리, 철근 콘크리트로 된 수평 모양의 지붕에 식물을 심어 풍요로운 옥상 정원으로 탄생
3. 개방형 평면 공간 :
필로티로 마루를 지탱하여 내벽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게 되어 원하는 대로 방배치 가능
4. 수평창 :
벽면의 가로폭에 꽉 차게 들어간 파노라마 창문을 통해 방구석구석까지 균일한 채광효과 가능
5. 자유롭게 설계한 정면부 :
필로티로 지탱되는 건물로 인해 외벽은 패널 및 유리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정면부 구성 가능
르코르뷔지에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대부분의 집은 벽이 건물 무게를 지탱했다. 벽이 두꺼워지는 만큼 집은 튼튼하게 지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집 안은 협소할 수밖에 없었고, 창문 또한 크게 낼 수 없어 채광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콘크리트로 필로티 기둥을 세워 여기에 하중을 두었다. 그 결과 내력벽이 없어 자유로운 공간 변화와 확장에 유리해졌다.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벽의 형태나 위치, 소재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집 앞으로 자동차가 진입하고 주차할 공간을 마련해 생활에서 누리는 편익도 늘었다.
또 전통주택의 넓은 마당을 옥상정원으로 대체하고 집 내부 계단을 활용한 경사로를 설계에 포함해 지상층부터 옥상까지 자유롭게 연결한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가로로 길게 낸 수평창 역시 푸아시의 전원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연출시켜 여가를 즐기기 위한 별장에 걸맞은 특색을 보였다. “주택은 주거를 위한 기계”라 했던 그의 구상이 마침내 빛을 발휘한 것이다.
르코르뷔지에는 1887년 시계산업으로 유명한 스위스 서부 산간지방 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Edouard Jeanneret-Gris)지만 외조부의 이름에서 딴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처음엔 실업학교를 다니다 시계 장식가가 되기 위해 옮긴 야간 미술학교에서 그는 재능을 알아본 교사로부터 건축을 배울 것을 권유받았다. 이후 스승과 함께 지역의 빌라 설계에 참여하면서 서서히 건축에 흥미를 붙인 그는 190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대학에 진학해 건축을 배우라는 부모의 요청을 뿌리치고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그는 파리에서 유명 학교의 수업을 청강하고 건축사무소를 뛰어다니며 건축에 대해 독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명성을 얻고 있던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의 눈에 띄어 인턴 자리를 얻었다.
그는 16개월 동안의 인턴 생활을 마치고 1911년부터 독일 드레스덴에서 출발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거친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떠났다. 그는 여러 도시를 둘러보며 건축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구축했다. 특히 시골집을 보면서 건축은 아름다움을 위해 형태를 왜곡하거나 과도한 장식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기 시작했다. 또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건축의 이상을 발견하고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파르테논을 감상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감각적 기쁨을 행복으로 승화시키는 건축의 새로운 정신을 상상한 것이다.
이후 스위스로 돌아가 건축 이론을 세우는 데 골몰한 그는 여행 중 만난 시골집의 간결한 구조와 파르테논신전의 기하학적 형태를 바탕으로 주택을 효율적으로 짓기 위한 공법을 찾는 데 천착했다. 그 결과 집을 의미하는 라틴어 도무스와 혁신을 의미하는 이노베이션을 조합한 돔이노(Dom-Inno) 시스템이 완성됐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건축사무소를 개업한 지 2년 만인 1922년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대전인 살롱 도통에 현대적인 도시계획안을 출품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파리 구도심에 교통센터를 포함한 복합 터미널을 갖춘 30층 이상의 고층 빌딩을 세우고, 수직형 건물 덕에 절약한 대지엔 숲을 조성하는 등의 계획이었다. 공공기관과 외곽부 공동주택까지 더하면 300만명을 수용할 수 있게 규격화된 건축을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 인물을 건축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소개한 까닭은, 브랜드 역시 사상과 행동이 일치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무형의 가치이자 산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인 동시에 이론가이자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건축 철학과 이론을 정리하고 오랜 실험과 분석을 통해 완벽한 조화를 찾아냈다. 이를 통해 내린 결론으로 집을 규격화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또한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주거문제에 대해 다양한 상상력을 가미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내며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건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남아 있다.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모뒬로르라는 표준화된 치수를 개발해 정확한 치수와 비례를 바탕으로 공간을 설계할 수 있게 했고, 자신의 도시 계획안을 지속적으로 더욱 개선한 결과 현대식 아파트의 효시로 평가받는 마르세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을 선보였다. 학교와 상점, 약국 등 편의시설을 구비한 이 주거단지 역시 모뒬로르를 활용해 동선을 고려해 설계했다.
나아가 그는 우수한 브랜드라면 지니고 있을 법한 스토리도 지니고 있다. 건축을 정식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은 이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여행을 자격증을 대신하는 징표이자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모험과 수련으로 인식했다. 그는 최고의 건축가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도 결코 완벽하지 않았고 다양한 비판을 받는 결점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점을 스스로 극복하고 성장을 위한 목표로 바꾼 뒤, 혹독한 시련을 거쳐 결국엔 최고의 건축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도전과 실패, 시련과 승리와 같은 신화 같은 삶의 매력이 그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낸 것이다.
르코르뷔지에는 말년을 지중해 인근 별장에서 보내다 1965년 수영을 하러 들어간 물속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가 그의 장례식을 루브르궁에서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도왔다. 자신의 주장대로 ‘주거를 위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 기계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던 삶이었기에, 르코르뷔지에가 줄곧 우익 성향을 보였음에도 미국은 물론 치열한 냉전의 한 축이던 소련까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을 냈을 정도였다. 이처럼 완벽하게 소멸했지만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브랜드가 또 있을까. 물론 그의 16개 건축물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