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패션업계의 판도를 뒤흔들며 등장한 브랜드가 있었다. 티셔츠와 니트 등의 기본적인 캐주얼웨어를 중심으로 기획 / 생산 / 유통을 통합적으로 운영해 오늘날의 SPA브랜드 개념을 처음 적용했던 '아메리칸 어패럴(American Apparel)'이다. 창업자 도브 차니는 대학교 기숙사 방에서 ‘미국에서 제조한 티셔츠를 캐나다로 수출한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로 창업을 결심했다. 아메리칸 어패럴은 창업한 지 10년 만에 직원수는 5000명에 달했고, 매장수는 전 세계에서 250곳이 넘을 정도로 성장해 미국에서 가장 큰 티셔츠 제조업체가 됐다. 한국에도 2003년 명동 1호점을 필두로 압구정, 부산 등지에 매장을 냈고 이듬해 연간 매출이 57억 원에 이르는 등 성공을 거뒀다.
아메리칸 어패럴은 여러모로 독특했다. 당시 많은 기업이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릴 무렵, 이들은 '메이드 인 다운타운'을 표방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공장을 짓고 아시아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를 고용해 업계 통상 임금의 2배를 지급했다. 이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비로소 옷을 입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창업자 도브 차니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또한 옷을 제조하면서 나오는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소재를 재활용했고,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태영열 설비를 구축하는 데도 앞장서는 등 친환경 기업의 면모도 선보였다. 무엇보다 이들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데는 파격적인 광고 전략이 큰 역할을 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이들의 광고는 전통적인 패션 광고보다는 마치 <플레이보이>잡지 광고처럼 보일 정도로 선정적으로 바뀌었다. 속옷도 채 입지 않은 여성 모델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미성년처럼 보이는 모델을 성적 대상으로 느낄법하게 촬영한 노골적인 사진들이 등장했다. 매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선정적인 광고는 소비자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소비자는 아메리칸 어패럴에 대해 언급할 때 더 이상 옷의 품질이나 직원 복지, 친환경 제조 환경 등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브랜드의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실패의 정점을 찍은, 사회적으로 경악할 만한 수준의 '오너 리스크'가 브랜드의 내리막 경사를 더욱 가파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업자 도브 차니는 2007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자사의 여성 직원에게 수차레에 걸쳐 성폭행을 일삼았다는 등의 혐의로 소송에 휘말렸다. 이전부터 수차례 성폭행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또 도브 차니는 속옷만 입은 채 공장을 돌아다니거나 회의를 주재한 사실도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선정적인 광고가 한편으로 심어줬던 대담한 브랜드 이미지는 창업자의 성폭행 사건 때문에 추악한 이미지로 급변했다. 최신 트렌드를 따르는 이들의 패션은 고객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기 시작했고, 자라(ZARA)나 H&M 같은 후발 SPA 브랜드의 파상공세로 인해 경쟁력을 상실했다. 결국 도브 차니는 2014년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고, 아메리칸 어패럴은 2015년 10월 파산했다. 과감한 노이즈 마케팅 전략과 안티패션 브랜드 이미지로 초기에 빠르게 주목을 받았던 이들이었지만, 결국 짧은 유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아메리칸 어패럴은 당시의 마케팅 성공 방정식을 과감히 탈피해 독자적인 행보로 소비자의 이목을 끌었던 점에서는 주목할 만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당시의 흐름은 업계를 선도하는 브랜드일수록 경쟁 브랜드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제품을 생산해 소비자의 기억에 강한 인식을 오래도록 남길 수 있게 하려는 광고 전략이 주류였다. 1990년대 들어 '차별화'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면서 깊이 뿌리내린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많은 기업이 차별화를 내걸고 치열한 경쟁을 추구하면서 브랜드와 상품의 수를 크게 늘려 시장으로 쏟아냈다. 여기엔 실체가 모호한 '고객 서비스 만족'이라는 구호까지 더해졌다.
반대로 아메리칸 어패럴은 기업의 사회적 활동에 적걱적으로 앞장서면서 제품이나 서비스에서의 차별화 대신 소비자가 느끼는 감정, 나아가 소비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심리적 요소를 더욱 중요시했다. 다시 말해 브랜드가 소비자와 깊이 있는 상호작용을 추구하면서 소비자가 브랜드의 정체성까지 돕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러나 선정적인 광고를 통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급격하게 전략을 수정했고, 또 그만큼 예상을 넘어선 주목을 받자 브랜드 지속 여부를 가를 위기의 씨앗이 싹텄다. 창업자는 직원 채용 과정에서 외모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급여도 외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게 하며 이전까지의 브랜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차별과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또한 이주노동자의 고용환경을 개선한다는 대외적 인식 역시 실상은 정반대였다. 2009년 미국 이민국은 아메리칸 어패럴 공장에서 취업 비자를 받지 않고 근무하던 불법체류 노동자 1500명을 적발해 해고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창업자는 창업 초기부터 이민자를 고용해 직원 복지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식을 심으려 애썼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며 기업의 도덕성은 크게 실추됐다. 급기야 전체 직원 중 절반가량이 회사를 떠나게 되면서 발생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체인력 채용 및 교육 등 엄청난 추가비용을 들였음에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침체를 맞아 실적인 악화일로를 걸었다.
현재 아메리칸 어패럴은 2015년에 이어 이듬해 11월 두 번째로 파산 보호 신청을 한 뒤 캐나다의 스포츠웨어업체인 길단 액티브웨어에 지적재산권과 일부 생산시설이 매각됐다. 재기를 노리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매력을 부활시키진 못하는 상태다. 아메리칸 어패럴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브랜드를 표방할수록 그 구호와 실제가 부합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배신감도 더 커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반면교사였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보듯, 오너 리스크가 얼마나 빠른 몰락을 부채질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