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완 감독론
2018년에 독립영화잡지 <아모르>에 기고한 글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작품은 박영완 감독의 <호구(虎口)>(2013), <빙신>(2014), <무직비디오>(2016), <주성치와 함께라면>(2017)에 한정함을 미리 밝힙니다.
예컨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박영완 감독식으로 바꾸면 이렇다. 웅성거리는 소리, 분주히 교실을 나가는 사람들, 전체를 조망하는 카메라, 한산해진 교실과 적막.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질문한다. “교수님. 뭐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뒤이은 교수님의 대답. “살살 물어봐 줘” 밖에서는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타이틀 롤. 마지막쯤 되면 이럴 것이다.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옥상을 서성거리는 한 사람. 대개 박영완의 영화는 위와 같은 어설픈 웃음으로 시작한다. 이 웃음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웃음기는 가시고 현실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요구한다. 본 장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이다.
네 편의 영화는 결말을 기준으로 두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빙신>(2014), <주성치와 함께라면>(2017)과 같이 현실에 좌절하는 유형과 <호구(虎口)>(2013), <무직비디오>(2015) 같이 현실을 극복하는 유형이다. 두 결말의 차이는 가혹한 현실과 그렇지만 살아갈 만한 현실이라는, 현실을 바라보는 박영완의 인식에서 생긴다.
본 장에서는 박영완의 두 가지의 인식을 따라가 볼 예정이다. 영화의 진행에 따라 달라지는 주인공의 감정변화에 집중하여 박영완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본 장의 주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과연 주인공이 현실을 이겨나가고 나아갈 수 있는 탈출구가 존재하는가. 박영완은 왜 그들에게 그런 결말을 쥐여줬는가.
작은 모순들이 만든 막다른 길: <빙신>, <주성치와 함께라면>
여자 친구에게 차이는 다함(<빙신>)과 오토바이 절도범으로 몰리는 섭이와 명달(<주성치와 함께라면>),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비극은 희화화된다. <빙신>의 여자 친구의 “다 잘 못 한다고!”라는 비난과 함께 들려오는 사물놀이로, <주성치와 함께라면>의 급작스럽게 멈춰 선 오토바이 절도범의 중요 부위 긁기 등은 주인공들에게는 비극이나, 관객에게는 희극적인 요소다. 등장인물과 관객의 인식 사이에서 오는 모순은 일종의 장치다. ‘비극의 희극’이라는, 희극을 꿈꾸며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모든 행보가 사실은 비극이 될 거라는 모순을 선전포고를 위한 장치 말이다.
작중 주인공들은 하나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여자 친구와 재결합이라는 개인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퍽 범사회적이기도 한 의지들. 이 의지들이 실현태로 발현되는 계기는 다름 아닌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빙어>에서는 친구의 권유로 빙어낚시를 하게 되는 등 등 비교적 작은 개입이었다면, <주성치와 함께라면>에서는 절도범으로 오해를 사게 만드는 등 적극적인 개입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계기를 제공했던 것과 달리 친구들은 소망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진 않는다. 어떻게 이룰 수 있냐는 말, 순응하라는 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주인공들에게 포기하라 말한다. 이들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여기서 두 번째 모순, 조력자들의 선의의 방해가 발생한다.
주인공들은 조력자의 방해에 굴하지 않는다. 되레 모순을 발판 삼아 자신의 의지를 공고히 한다. 다함은 잡은 빙어를 보며, 섭이는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주우면서 가능성을 재확인한다. 가능성의 기원은 자신이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믿음, 자신의 작은 행동에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러나 믿음에 대한 근거는 다분히 외골수적이고 사회에서 매우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 내 작은 행동이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빙어 낚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가능성 없는 근거들을 토대로 한 믿음은 사회-여자친구, 진짜 오토바이 절도범-와 부딪힐 때 여지없이 무너진다. 여기서 주인공들은 이 공간에 자신이 딛고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고 있던 현실이 붕괴되었다.
기실 자신의 재능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이 드러나자마자, 현실은 사정없이 몰아친다. 1차는 주인공의 것이었던 재능이다. 수없이 낚아 올렸던 빙어들은 비닐과 함께 터진다. 쓰레기를 아무리 주워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2차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다. 여자 친구는 빙어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지요는 그에게 "병신"이라 말하고, 명달은 요셉에게 붙는다. 3차는 현실이다. 다함은 결국 혼자 있게 된다. 섭이는 정학 처분을 받는다. 카메라는 조망할 뿐이다. 마지막 4차, 영화의 크레딧이 떠오른다. 결말은 실패로 고정되었다. 그들의 무너진 신념은 영화를 비극으로 만든다.
주인공들이 추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모순들이다. 개인이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모순들은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대표한다. 사회는 개인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강력한 공간이다. 이 힘이 현실과 결합할 때, 개인은 철저히 현실에게 유린당한다. 그제야 개인은 탈출구는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 사실을 모른채 달려 나갔던 주인공들은 좌절한다. 작은 모순들이 만들어낸 막다른 길은 곧 사회에게 패배하는 개인을 의미한다. 이것이 박영완이 인식하는 첫 번째 현실 인식이다.
열려 있던 탈출구: <호구(虎口)>, <무직비디오>
**이 절의 ‘영완’은 감독 박영완이 아닌, <무직비디오>의 등장인물인 영완을 의미한다. 구분을 위해 감독 박영완은 ‘박영완’으로, 등장인물 영완은 ‘영완’으로 표기한다.
그렇다고 박영완의 모든 세계가 좌절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다. 박영완의 세계에도 분명히 희망은 있다. 다만 주인공 자신은 모르고 있을 뿐이다.
<호구>의 호준, <무직비디오>의 영완. 두 주인공들은 목표를 위해 행동한다. 호준은 취직을 위해 면접을, 영완은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 전 작품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행복해야할 작업들은 두 주인공에게는 고통스럽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벌인 까닭이다.
학창시절 호준은 어머니에게 쓸모없는 인간이라 들어왔다. 어른이 된 그는 이제 자신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인간임을 증명 받고 싶다. 그것이 자신의 전공과 전연 관련 없는 토끼 조련사임에도, 그것마저 사실은 호랑이 밥 만드는 일이라도 말이다. 영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동생의 이력서 속 "불효자"라는 언어는 자신이 무시하려 했던 자신을 현실로 끄집어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돈은 벌지도 않고, 있는 것이라고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몇 편의 단편 영화뿐이다. 29살의 무명 영화감독, 우악스레 들이밀던 카메라는 자신이 패배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영화가 흘러감에 따라 주인공들의 심리를 더욱 악화시킨다. 주인공들 모두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음에도 계속 호랑이 밥을 만들고, 카메라를 돌린다. 주인공들의 무리는 안타깝게도 보상받지 못한다. 영완의 손에 들린 횟집의 물고기처럼. 영완이 바다에 풀어준 물고기는 1분도 안 돼 다른 사람의 낚싯대에 걸린다. 그렇게 영완의 희망은 끝난다.
그러나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자. 잡힌 물고기는 과연 영완이 풀어준 물고기일까? 우리는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저 추측했던 것뿐이다. 영완의 물고기는 다른 이에게 잡혔고, 영완은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 추측이 잘못된 것이라면, 영완의 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 테고, 어쩌면 광어 떼의 대장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탈출구는 있다. 단지 남들의 시선들, 자신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단정들이 그들의 눈을 가렸을 뿐이다.
호준에게 호랑이는 투영된 자신, 영원히 우리를 빠져나갈 수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의 감옥은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여닫을 수 있다. 호준이 자신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정확히 자각한 순간, 그는 탈출구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게 됐고, 나아갔다.
영완은 충혈된 눈으로 노을을 본다. 막막하고 미칠 것 같은, 오갈 데 없는 마음은 파도와 함께 떠다닌다. 다함의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기 전까지만 말이다. 영완이 부르는 애국가와 함께 끝날 줄 알았던 영화는 갑자기 다함을 비춘다. 그 순간 앞의 장면들은 전연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온갖 사람들에게 욕을 먹은, 무의미한 줄 알았던 영상들은 전체의 과정들을 거쳐 영화가 된다. 찍는 행위를 통해 영화는 시작할 수 있다. 돌아가는 카메라 안에서는 친구를 팔아먹는 쓰레기라도 주인공이, 과거의 주인공들도 현재의 주인공으로, 모자란 조수도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는 다함의 웃음은 이것이 하나의 영화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비록 찝찔한 맛이 나지만 영화는 완성되었다. 영완은 나아갔다.
그들이 탈출은 간단했다. 그저 자신의 여러 모습 중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던 자신을 받아드린 것으로 자신의 터널을 끝냈다. 현실은, 어쩌면 그렇게 가혹한 곳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현실은 자신의 분신이다. 탈출구를 나온 그 순간, 열려 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자신을 밀어 붙인 것은 자신임을, 그리고 끝내는 것 또한 자신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갛게 끓어오르는 희원과 함께 “그렇지만 아침이 되면 아름다울 거야” 박영완은 두 영화에서 자신에게 외친다.
지금까지 4편의 영화를 박영완의 현실 인식에 따라 두 가지로 분리해서 살펴봤다. 첫 번째 유형은 개인이 사회에 의해 무너지는 현실이다. 반면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극복되는 현실이다.
사회는 여러 명의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각종 보이지 않는 규칙들은 결코 개인으로 있을 수 없게 만든다. 사회가 만든 현실에서 개인은 그저 꺾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이 만들어낸 현실은 다르다. 그곳에는 오직 그 자신만이 있다. 자신을 극복한 순간 현실은 그와 일체를 이룬다. 지나친 판단일 수 있지만, 박영완은 양가적인 세계의 논리에서 고민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두 논리에 정답은 없고 치열한 고민만이 있다고, 그리고 그런 고민은 젊은이의 것이라고! 박영완의 이야기가 힘이 있는 데는 희극과 비극을 줄다리기하는, 결코 하나의 단면만을 않으려 하는 그의 고민에 있다. 30대를 살고 있는, 40대, 50대, 그 이후를 살아갈 그는 영원히 젊은 감독이다. 김용의 말을 빌려 찬한다.
"人生就是大闹一场, 然悄然离去(인생이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조용히 떠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