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 쓰다.
엊그제 연락을 주고받던 선배가 갑작스러운 화재로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의 목소리 "잘 되감미꺼?" "함해 보이소", "괜안심더" 이제 막 노란빛이 들기 시작한 단감 밭, 만평의 감밭을 일구던 그가 그리워진다. 그때 낮술 한잔 하자고 할 때, 같이 할걸.... 그때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지 못한 일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바쁘다는 핑계로 참 많은 걸을 모른척하며 살았구나… 아직 사랑해야 할 일이 많은데 떠난 그가 야속하기도 하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먼 길 떠난 선배를 생각하며 나도 유언장을 짧게 남겨 본다.
마흔 살의 시
문정희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 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 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 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 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까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 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 놓는구나.
1. 오늘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아직 사랑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난다면 조용히 떠나가겠습니다.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 아버지 그 깊은 은혜에 아무런 보답을 하지 못하고 떠나서 너무도 미안합니다. 자식을 위해 애써주셨는데 늘 부족하다고 투정만 부린 것 같아요. 엄마, 그 굵어진 손마디를 보면 참 마음이 아팠는데 오히려 짜증만 낸 것 같아 너무 죄송합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 꼭 안아드린 적도 없는 듯하네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 그곳에서는 이제 편히 쉬고 계시지요? 고생만 하고 아프시게 되었는데,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쉬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동생 00이 어릴 때는 질투하는 마음에 동생을 괴롭힌 것 같은데 크면서 오히려 너에게 많이 기대었단다. 착하고 이쁜 지은이 만나 일가를 이루었으니 더 아끼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2. 가족에게 하고픈 말
고마운 우리 가족, 모나고 성질 급한 아내, 경제관념 없는 나 때문에 가장으로서 부담을 많이 느낀 우리 남편 너무 고마웠어요. 그동안 고생시켜 너무 미안해요. 첫째, 둘째,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보물, 저 별보다 더 빛나는 아이들, 덕분에 엄마는 사랑과 치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단다. 고맙고, 사랑합니다. 내 곁을 지켜준 강아지 동구도 사랑해.
3.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에 관하여
내가 가진 소유물이 그다지 없어서 쓸 말이 없지만 맥북은 첫째가 가지고, 캠코더는 둘째가 틈틈이 찍고 싶은 것을 찍어보면 좋겠네,
내가 타고 다니던 고물 차 모닝은 …
4. 내가 하던 일에 관하여
능력에 비해 하던 일이 너무 많았지만 마무리하고 싶었던 단편 다큐 두 편, 하 00 평전, 마무리하고 싶은데. 잘 될까?
5. 나 자신에 대하여
-장례 : 가족들만 불러 간소히 장례를 치르고, 지인들에게만 문자로 알린다.
-남아있는 분들께 드리고픈 말 : 이 좋은 세상, 좋은 분들 만나 사랑을 배우고 떠납니다.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로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