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영화 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미셸 프랑코 감독의 영화 <썬다운>은 감독의 전작 <크로닉>에 이어 배우 팀 로스와 다시 조우한다. <크로닉>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남자 간호사의 시선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우아하게 그려냈다면, <썬다운>은 여유로운 표면 안에 긴장감을 밀도 있게 구성함으로써 죽음을 한층 더 냉혹하게 바라본다.
햇볕이 내리는 멕시코 고급 리조트에서 백인 일가족이 휴양하는 시간을 보낸다. 선베드에 나른히 누워있는 앨리스(샬롯 갱스부르)는 리조트의 풍광 속 한적한 시간을 깨고 급작스럽게 가족의 비보를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남자 닐(팀 로스)과 앨리스, 그녀의 자녀는 비행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여권 미소지로 닐은 동행하지 못한 채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낸다. 뒤이어 멕시코에 남은 닐은 관객의 기대를 뒤엎고 다시 휴양을 즐기며 의아한 행동을 취한다.
<썬다운>의 오프닝시퀀스는 어딘가 동떨어져 한없이 여유롭기만 한 영화의 자장을 뚫고 새어 나온 이질적인 전화 벨소리 하나로 극의 톤을 변모당한다. 관객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할 틈도 없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고 휴양을 즐기는 닐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목도한다. 닐과 앨리스, 그녀의 자식들이 공항에 가기 전 리조트 내 이동차를 타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은 가족의 비보를 접해 슬픔이 어린 표정 대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각자의 세계로 떨어져 서로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 머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개인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닐의 행동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멕시코 해변 휴양지의 푸른 색채와 지상에 새기는 강렬한 햇볕은 영화의 여유로운 겉면을 이룬다. 그럼에도 휴양지의 감미로움이 느껴지기보다 거짓으로 일관하는 닐의 말과 행동에 짐짓 불편하다. 관객은 불편한 감정을 이입할 곳을 찾지 못한 채로 닐을 바라본다. 이에 반해 닐은 집요하리만큼 태연한 감정을 고수한다. 주요 인물과 관객 사이의 보이지 않는 거리는 닐의 무감각한 표정과 행보를 살피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하게 한다. 영화 속 인물의 삶, 생각, 감정까지 은밀하게 살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보이는 영화가 있다면, <썬다운>은 표리부동한 닐의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판단하는 관객이 되도록 만든다.
영화의 후반부, 관객은 닐에 대한 판단을 다시 돌아본다. 닐이 쓰러져 간 병원 장면에서 뜻밖의 사실을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의사는 닐의 건강이 이전에 받아본 검사 결과보다 더 손 쓸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고 말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 이르러 닐의 모든 행동이 죽음을 앞둔 자의 합리적 행동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설익은 판단을 뒤틀며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썬다운>이 죽음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도 영화에 대한 의문을 더한다. <썬다운>에서 인물의 죽음은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후 처리를 더 드러낸다. 슬픔을 읍소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비애의 감정이 놓여야 할 자리엔 사람이 죽은 뒤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대신 채운다. 종이 소리와 펜 소리는 죽음에 대한 냉소를 더 극대화하며 비정하게 다가온다. 또 영화 곳곳에 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시점 숏이 여럿 보인다. 닐이 암 환자라는 사실을 접한 후 다시 영화를 상기하면 닐의 시점숏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영화의 초반, 닐은 해변에 앉아 바다에서 노니는 베르니세(아주아 라리오스)를 바라본다. 햇빛을 내리 받으며 바닷물의 표면과 같이 빛나는 그녀의 신체는 죽음과는 아직 먼 산 자의 활기에 차 있다. 닐은 그녀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죽음을 앞두고 삶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까. 닐의 시점숏은 그의 눈앞 삶의 광경을 훑으며 그의 허망한 감정을 대신 표현한다. 닐의 시선에 죽음을 앞두고 삶을 관망하는 자의 미련을 두었지만, 냉혹한 영화의 세계는 끝내 그의 죽음 뒤에도 그가 살다 간 흔적을 증명하는 보험 서류 한 장만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