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여자

째려보지 마, 부릅뜨지 마.

by 무딘식칼

20대 초반의 일이다 벌써 30여 년 전 이야기...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내 필명에서도 살짝 느껴지다시피 좀 차갑고 무섭게 생겼다 응 그렇다 내가...

요즘이야 더 하지만 그 당시도 화장 전 후가 상당히 많이 다른편였는데 그날은 화장도 안 하고 출근했다가 늦은 퇴근길 막차 버스 안에서 친구랑 곧 나 올 새 차에 대해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abs에 에어백까지 달았다는 자랑질.

근처 버스 승객들은 듣기 싫어도 우리의 수다를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의 버스 안은 지금처럼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적막한 공간이 아니었다. 타인의 수다가 라디오 사연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공유되던 시대.

우수갯소리로 바람난 남편 얘기 듣던 버스 승객들이 몇 정거장을 더 가서 이야기가 끝나고서야 내렸다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버스안에서 긴 시간을 내 새 차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나는 친구보다 먼저 내렸다.

내가 내리는 정거장은 원래 사람이 많이 내리지 않아, 거의 혼자 내리기 일쑤였다.

그날은 밤도 늦어 정류장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버스가 다시 서더니 급하게 어떤 남자가 내리는 걸 보았다.

안 내리려다 내린 느낌?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고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남자는 내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난 내 뒤통수와 등짝에 강력한 에너지를 받았는데 그게 뭔지 정말 느낌은 팍팍 오는데 짜증도 나고

오늘의 내 외모 때문에 남자가 따라붙었을 리는 없다. 뭐지? 화장을 안 했을 때는 아저씨, 형, 오빠 소리를 주로 듣던 입장이라 솔직히 말하면 오늘의 내 외모 때문에 남자가 따라붙었을 리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했다.

‘뭐야… 나 아는 사람인가?’

그냥 같은 정거장에 내리는 타인일 수도 있었지만 뭐든 예민하고 과하게 상상하는 나에게는 그는 낯선 타인이 아니었다.
‘아니면 착각인가?’
‘설마… 강도?’

삐삐밖에 없던 시절이다.
휴대폰도 없고, CCTV도 없고, 위치 공유도 없고, 119 말고는 112도 잘 모르던 시대, 게다가 동전을 넣고 공중전화로 신고한단 말인가?

머릿속이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뛸까?
물을까?
발로 차줄까?

그리고 더 무서운 생각.

저 남자가 뒤에서 칼로 푹 내 옆구리를 찌르면 난 그대로 쓰러지고 죽겠지? 단서를 남겨야 하는데 어쩌지?

피로 글씨 써야 하나?
아니면… 그냥 끝인가?

진짜 신기한 건, 단 몇 초 동안 인간은 수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다.

당시 나는 심하게 골초였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남자의 얼굴이나 동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대 물고, 불 붙이는 척하면서 일부러 멈춰 섰다.

그리고 라이터불을 붙이면서 남자를 돌아봤다. 그런데 내가 본 그 남자는 강도의 모습이거나 나에게 반해서 내린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남자의 얼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눈을 피하지 못해서 몹시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류가방을 얌전히 들고 있었고 귀부터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순간, 1초간의 정적.

나는 남자의 눈을 보고 세렝게티 야생에서 만난 한 마리 임팔라임을 직감했다.

난 느꼈다. 나는 배부른 사자였고 그는 임팔라임을.

어흥하는 마음으로 뒤돌아 담배를 푹푹 빨아주면서 집으로 향했다.

괜히 쫄았다.... 늦은 밤의 해프닝으로 생각했다.

남자가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남자는 임팔라처럼 점프 점프 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정면으로 마주 섰고

"나한테 할 말 있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남자는 다시 공손한 손을 하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저… 자동차 보험 좀 들어주세요….”

"……에?"

공손한 존댓말에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에 호기롭게 반말을 찍찍 남발하며 기를 죽이려던 나는 순간 숙연해지는 기분마저 들었고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남자는 덜덜 떠는 손으로 주섬주섬 서류가방에서 무엇을 찾더니 찾던 물건이 없는지 다시 양복 속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내밀었다.

"자동차 보험 김 땡땡"

알고 보니 그 남자는 버스 안에서 내 수다를 듣던 사람이었고 나와 내 친구의 대화를 내 뒤에서 듣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천상 여자여자하게 생긴 내 친구를 보고 용기가 생겼고 오늘 회사에서 교육받은 고객 만드는 법이 생각나 결심을 했다는 거다.

이 사람을 나의 첫 고객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그런데 막상 내 친구가 안 내리고 형님 포스의 나만 내리는 걸 보고 순간 망설였다고 했다.

그래서 하차가 늦었던 거고 내 뒤를 쫓으면서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형님 같은 내가 라이터에 불을 붙이며 자신을 쏘아보는데 살기를 느꼈다고 했다.

함부로 말 걸었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데 그가 내린 버스 즉 내가 내린 버스가 막차였던 것을 깨닫고 여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포기하면 남자가 아니다는 생각에 다시 달려왔다는 거다.

그 절박함이 살기에 대한 공포를 이겼던 것이다.

나는 그 남자의 무모하고도 멋진 용기에 항복했다.

결국 그는 나의 첫 보험 설계사가 되었고, 내 친구들의 차 보험까지 싹쓸이하며 성공한 보험맨이 되었다.


나중에 친해지고 들은 얘기인데 내 등짝을 향해 열렬하게 뜨겁게 텔레파시를 보냈단다.

"나의 첫고객이 될것이다."

그래서 내 등짝에 꽂히던 그 이상하고 요상했던 느낌을 받았던 거다.


꽤 친하게 몇 년을 지낸 거 같은데 성격이 선비 같은 그 보험맨과 성격이 칼 같고 어디로 튈지 예상 안 되는 나와는 오랜 친구로는 남지 못했다.
선비 같은 그와 칼 같은 나는 애초에 오래 버틸 조합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막차를 과감하게 버리고 달려오던 그 밤은 이상하게 또렷하다.
아마 그게 시절인연이었겠지.
잠깐 스쳐도, 한 장면처럼 오래 남는 그런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