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픽션
남편 없이 키워야 하는 내 새끼는 기특하게도 애미를 힘들이지 않고 쉽게 나와줬다.
남들은 셋넷 잘도 낳는다.
나는 하나를 잃었고, 지금은 꼴랑 하나다.
근데 니네 새끼 다 줘도 안 바꾼다. 내 새끼는.
나는 힘겨운 삶을 살아냈다. 내 새끼만은 잘 키워야겠다 다짐했다.
나는 부모도 모른다. 어느 시골집에서 키워졌다. 정식으로 입양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분들은 나를 거둬주셨다.
내가 순하다고 ‘순이’라고 이름도 지어주고, 밥도 굶기지 않았다.
워낙 성격이 좋아 웃으며 인사하고, “다녀오세요” 배웅하니 나를 이뻐해 주셨다.
그러다 시집까지 보내주셨다.
같은 시골 동네에서 적당한 혼처를 찾아서.
나를 키워주신 그분들은 남편감이 책임감 강하고, 가정을 안정적으로 지킬 거라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남편은 첫날밤 이후로 단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첫날밤 한 번으로 임신까지 해버렸다. 임신을 해서 배가 자주 고팠지만 시부모님은 넉넉하지 않으신 분들였다. 내가 곰살맞게 인사하고 아는 체 해도 딱딱한 얼굴로 니 남편 찾아오라고만 하셨다.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나는 하루하루 피 말리는 날을 보냈다.
어르신은 술버릇이 고약했다. 이상하게 내가 인사를 해도 좋은 소리를 안 하셨다.
그래서 자는 척하고 안 나오면, 안 나온다고 으악질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임신으로 인해 잠에 취해있었는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시며 어른이 들어오는데 아는 척도 안 한다고 화를 내며 내 배를 걷어찼다.
그렇게 내 배 속의 아가는 유산이 됐다.
유산이 된 건 내 탓이 아닌데 아이를 흘렸다고 친정으로 쫓겨났다.
그분들은 미역국을 한 사발 내어주셨다.
고생했다며 내 얼굴을 만져주시고 뒤돌아 당신들 방으로 들어가며, 혀를 끌끌 차는 모습에 내 모습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서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다.
남들은 피서다 뭐다 떠나는 계절인데… 나는 사랑에 빠졌다.
시원한 바닷물에 뛰어들듯,
그렇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퐁당 빠져버렸다.
우리 집은 한적한 시골 동네, 야트막한 언덕 중턱에 있었다.
고개를 넘으면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었다. 대체로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우리 집은 경사가 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다 보면 담이 낮았다.
건장한 어른이면 “읏샤” 한 번에 넘어올 높이였다.
담 끝으로 가야 어른 머리카락이 보일락 말락 한, 그런 담.
녹슨 파란 철대문은 가끔 힘없이 삐걱 열리기도 했지만,
여긴 도둑 한 번 들지 않는 동네였다.
슬래브 지붕을 덮은 나지막한 1자형 집.
그 앞 창고 비스름한 곳을 고쳐 내 거처로 쓰고 있었다.
어른들이 일을 나가고 없을 때면,
나는 그 낮은 담장에 앉아 하늘을 보곤 했다.
지나가는 인기척이라도 나면 고개를 휙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은 없었고 날개가 고단한 새들이 앉아 쉬어가거나 살이 통통하게 오른 들쥐가 지나가는 게 다 였다.
그날도 담장에 앉아 지그시 눈을 뜨고 저 멀리를 보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솔길 쪽에서 이쪽으로 걸어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짧지만 튼튼한 다리를 가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 숨이 막혔다.
그 멀리서도 그 사람의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벌겋게 상기됐을 내 얼굴이 부끄러웠다.
당장 내려가 방으로 뛰어들어가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분이라도 두들기고 싶었다.
그런데 내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 계속… 담에 붙어 자란 버섯처럼 있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가슴을 움켜쥐었다.
‘혹시 심장병 있으세요?’
그가 그런 말을 하면 어쩌지.
얼굴이 너무 빨개졌는데…
‘얼굴에 화상 입으신 것 같아요’라고 하면 어쩌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장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지나가 주길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든 해주길 기다리는 건지.
남자가 가까워 오자, 예전에 맡아본 냄새가 났다.
아저씨가 가끔 주머니에서 던져주던 사탕.
반짝반짝한 종이에 싸여 있던, 누런 사탕 냄새.
그 남자는 달콤한 냄새를 퐁퐁 풍기며—
내 기대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다.
가버렸다….
뒤를 밟아야 하나, 어째야 하나.
이렇게 보내야 하나.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금사빠인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가는 뒷모습이라도 더 보겠다고 몸을 내밀었다가—
담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픈 건 둘째 치고,
그 사람이 봤을까 봐 너무 창피했다.
“괜찮으세요?”
“네? 네!”
나는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지고 흙을 툭툭 털어냈다.
그런데 남자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이 무슨… 내 꼬락서니가 아무리 그지 같아도,
내가 아무리 괜찮다 해도… 그렇게 가버린다고?
그 순간, 이상하게 썽이 났다.
어떤 오기였을까.
나는 전력을 다해 그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등짝에 올라타야겠다. 목을 감싸 안고 가지 말라 붙잡아야겠다.
그 심정으로 심장이 터지게 달렸다.
내 심장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하필 내가 발돋움해서 높이 뛰어오르던 그 타이밍에,
내 설정으로는 그의 등뒤에 올라타 앉는 것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돌아섰다.
자연스레 내 작은 몸이 그의 품에 안기며 같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어?”
“어?”
당황한 남자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의 체취가 강하게 내 코끝을 파고들었다. 마음의 고향 같은 냄새였다. 본능에 이끌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그 남자의 입술을 덮쳤다.
우리의 난잡한 행동이 재미있었을까.
해님은 땅 가까이 내려앉아,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우리의 사랑도 뜨거워졌다.
거의 매일 우리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그이를 보며
어르신들도 무언가 눈치를 채신 듯했다. 어느 날은 내 밥을 챙겨주시며
"순이야, 임신했냐?"라고 물으셨는데 잘 몰라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네 어르신이 놀러 오셨는데
"못 보던 개네? 어디서 났어?"
"잉 몰러 순이가 불러들였어"
"그려? 곧 복날인데 저 튼실하게 생긴 수놈 한 마리 잡음 워뗘?"
어르신들의 대화를 눈치챈 나는 내 옆에 누워 자고 있는 그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 끄적여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