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각성
《균형자로 태어났습니다》
제2화. 어둠의 각성
2000년 겨울, 서울 외곽 산 언덕
터널 공사 현장 앞
인부들이 다급하게 장비를 옮기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터널 입구 주변으로 긴장감과 불안감이 자욱하게 감돌았다.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안전모를 벗어던졌다.
“아유 진짜, 시벌! 조사할 때는 평범한 돌이라며! 제대로 확인이나 한 거야?”
그의 목소리에 주변 인부들은 한마디도 못 하고 눈치만 보며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책임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당장 공사 중단! 저 돌인지 뭔지 정체부터 확실히 알아낼 때까지 손대지 마! 전부 철수해! 무슨 돌이 피를 흘리냐고! 기분 나쁘게.”
인부들과 공사 책임자가 터널을 벗어났다. 터널의 흙더미 사이에 윤기가 흐르는 대리석 같은 돌이 벽처럼 서 있었고, 가운데에서 붉은빛의 끈적이는 액체가 마치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활기차게 공사가 진행되던 터널 안쪽은 인부들이 전기를 끊으면서 순식간에 어둠 속에 파묻혔고, 폐터널이 되었다.
침묵이 흐르던 가운데,
피를 흘리던 거대한 돌이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희미한 빛 아래서 돌 표면에는 기이한 문양이 흐릿하게 반짝였고, 마치 그 안에 무언가 살아 있는 듯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때, 깊은 어둠 속에서 불길하고 낮은 소리가 터널 벽을 타고 퍼져 나왔다.
“우르르… 그르르르르…”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기괴한 소리. 표현할 수 없는 소리였다.
같은 시간, 서울의 산부인과 병원
어둠 속이었다. 따뜻한 물결이 내 몸을 감싸고, 나는 오래도록 그 안에 잠겨 있었다.
인간은 물속에서 숨을 못 쉰다 들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떨리는 파동이 다가왔다.
“지이잉… 지잉―”
소리가 아니라 파동이었다. 간질간질거리는 느낌. 난 이 파동을 안다.
엄마가 병원에 갈 때마다 들려오던 것.
내 심장 소리를 듣고 기뻐하던 엄마의 떨림.
배를 감싸던 아빠의 따뜻한 손길.
나는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내 몸에서 파란빛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단전에서 시작하더니, 그 빛은 몸을 타고 전신을 흐르기 시작했고 점차 강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곧 나갈 거라는 신호를 주고 있었다.
파동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왔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여보, 이 빛을 보세요. 아기가 나오고 싶은가 봐요.”
그 목소리는 따뜻했고, 리듬은 엄마의 심장과 겹쳤다. 내 안에서 쿵쿵 울리는 작은 박동이 파동과 하나로 맞물렸다.
갑자기 양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천천히 접어 가는 손처럼, 공간이 좁아졌다.
나는 좁은 통로로 밀려 나가야 했다. 물컹거리고 따뜻했던 벽이 나를 조이면서도 동시에 밖, 환한 빛 쪽으로 이끌었다. 밀어내는 힘과 빨아들이는 힘이 어긋나며 나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머리가 보인다! 조금만 더 힘을!!”
낯설지만 단호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잡는 감촉이 전해졌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잡힌 채로 뭔가에 이끌리는 느낌, 억지로 당겨지는 느낌이 교차했다.
그런데 그 불편함 속에서도 나는 선명히 알았다.
내 안에는 어떤 무게와 결의가, 말로는 다 못 할 분명한 기운이 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치솟았다.
세상에 도착했다는 선언.
혀끝까지 차오른 말은 분명했다.
내가… 왔노라!
하지만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우렁찬 선포가 아니라,
갓난아기의 처절한 울음뿐이었다.
“응애! 응애애―”
산중턱의 터널 공사 현장 한복판
거대한 돌이 떨렸다.
“응애… 응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기의 울음소리.
돌 표면의 문양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며, 그 틈새로 검붉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크르르르…”
낮고 음산한 울음소리가 터널을 타고 울려 퍼졌다.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병원 분만실
그 소리는 사람들 귀에는 갓난아기의 울음으로 들리겠지만, 그 파동은 초음파처럼 퍼져 나갔다.
울음이 방을 타고 천장을 지나 땅을 통해 지하 깊은 곳까지 퍼져 나가자,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던 것들이 반응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 영(靈)으로 떠도는 것들, 오래 봉인되어 있던 것들, 미세한 진동으로만 존재하던 것들. 모두가 내 울음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아주 오래된 것들이 내게 응답했다. 낡은 봉인들이 떨리고, 숨죽였던 기운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중에서도 하나.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 눈을 떴다.
폐터널의 그 거대한 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저것을 깨웠구나.’
공포가 밀려왔다. 태어난 지 몇 분도 안 된 몸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안 된다. 저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하지만 난 방금 막 태어난 신생아일 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발을 제어할 수 없었다.
‘막을 수 없단 말인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 입에서는 그저 울음소리만 터져 나왔다.
“응애, 응애, 응애.”
나의 울음소리는 더욱 강력하게 울려 퍼졌다.
분만실 안
출산의 피비린내가 퍼지자 구석에 있던 어린 조무사가 갑자기 창문을 벌컥 열고는 구역질을 했다. 분만을 처음 보는 어린 여자애로서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만, 창문을 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강박사가 당황했다.
창문을 여는 순간, 창문 틈을 막아 두었던 금줄 결계에 틈이 벌어졌고, 그 틈으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응애―응애……
강박사가 황급히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봤다.
‘이런, 결계가 뚫렸어!’
병원 밖
조용하던 거리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파동이 되어 퍼져 나갔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료폐기물 처리장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봉투 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빠져나왔다. 그들의 텅 빈 눈에는 끝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병원 앞 큰 나무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고개가 꺾인 몸뚱어리가 갑자기 반동을 주어 마구 흔들더니 나무 가지째 떨어졌다. 그리고 병원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뭇가지를 목에 맨 채 질질 끌면서.
횡단보도에서는 끊임없이 차에 치이기를 반복하던 자살령이 걸음을 멈췄다. 처음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영혼이 자신들을 깨운 힘을 찾아 병원을 서서히 둘러쌌다.
폐터널 역시
터널의 기괴한 소리가 커졌다.
“끼이익… 끼이이익…”
커다란 바위 하나가 천장에서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그 소리에 바닥이 쩌저적 갈라진다.
거대한 돌의 균열이 더 커졌다.
검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들려오는 무언의 소리가 병원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엄마의 품 안은 따뜻했다.
엄마가 내 이마에 무언가를 그렸다. 백련화 문양이었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공기가 바뀌었다. 시끄럽게 몰려들던 영들의 기척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 깨어난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아빠의 손이 내 등에 닿았다. 따뜻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내 아들.”
아빠의 목소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빠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아빠…’
말할 수 없었지만, 내 작은 손에 모든 마음을 담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고, 엄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에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세 사람의 아우라가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바깥의 모든 소란이 멀어지고, 익숙한 온기 속에 마음이 놓였다.
‘이런 느낌이 사랑인가?’
병원 복도
복도에 있던 할아버지와 최기사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기쁜 표정이었다. 특히 최기사는 거의 깡충 발로 기뻐했다.
“선생님, 손주가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경사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할아버지는 기쁜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기운을 느낀 할아버지가 손바닥을 펼쳐 막으며 말했다.
“이놈, 안 된다!”
할아버지가 펼친 손바닥 끝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벽처럼 터져 나갔다.
바로 그 순간, 병원 창밖 어둠이 한 번 크게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