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자로 태어났습니다.

3화 그것이 깨어나다.

by 무딘식칼


제3화. 그것이 깨어나다.

분만실

간호사가 나를 조심스럽게 강보에 싸서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할아버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 녀석, 할아비를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허허허."

할아버지의 따뜻한 웃음에 아빠와 엄마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내 이마에서 희미한 백련화 문양이 떠올랐다.

엄마의 표정이 금세 불안으로 가득 찼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혼령들이 깨어날까 봐 걱정되어서 허락 없이 먼저…."

할아버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 괜찮다. 애미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느냐."

할아버지는 나를 엄마의 품에 안겨 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구나. 몸이 성치 않은데 미안하구나…."

강 박사는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그는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파파팍!

불꽃이 터지면서 숨겨져 있던 혼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 눈으로 서 있는 그들은 허망해 보였다.

강 박사는 경악하며 말했다.

"이런… 너무 많이 몰려왔는데요!"

할아버지는 침착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나를 품에 안은 아빠와 지친 몸을 힘겹게 이끌며 걷는 엄마, 그리고 긴장한 채 뒤를 엄호하는 강 박사가 뒤를 이었다.


지하주차장

할아버지가 강 박사에게 부탁했다.

"강 박사, 이런 일은 흔치 않소. 원인을 찾아야 하니, 집으로 가서 준비를 해주시구려."

강 박사는 굳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선생님. 반드시 준비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미안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 일로 내가 강 박사에게 신세를 질지도 모르겠소."

강 박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선생님을 도와야죠."

최 기사가 차를 우리 앞으로 몰고 왔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태웠다. 그의 옷차림은 허술했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고 온 듯 불안한 표정이었다.

병원을 빠져나가며 할아버지는 자동차에 결계를 다시 펼쳤다. 차는 빠르게 도로를 벗어났고, 결계 덕에 혼령들은 그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차 안에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집으로 갑시다. 집이 가장 안전할 테니까요."


차 안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아빠의 심장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호흡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균형자로서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마...'

그러나 자동차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빠가 급히 말했다.

"삼촌, 이 길이 아닌데요!"

최 기사는 초점 없는 눈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흔들었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다.

자동차는 속도를 높이며 폐터널로 향했다.

아빠가 최 기사를 막으려 하자 할아버지가 달리는 차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결아, 지금은 참아라. 사람들이 위험하다. 아기도 위험하고, 평정심을 찾거라."

창 밖 도로에는 늦은 밤 집으로 귀가하는 가족들이 탄 차, 연인의 차, 나처럼 어린 아기를 태운 차들이 여유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는 마지못해 최 기사의 어깨에서 손을 뗐고, 차는 터널 방향으로 질주했다.


폐터널 공사장 앞

차가 표지판과 진입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거칠게 들어갔다.

폐터널 안 대리석처럼 반짝이는 돌을 향해 돌진하던 중, 최 기사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하늘나라와 현생 중간 어디쯤, 수호령들의 마을

쇼핑몰 유아용품 코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건을 고르고 있는 덩치가 거대한 혼령이 쇼핑카트에 아기 물건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흐음~ 흐흐흐음~"

주변에 평화로워 보이는 영혼들이 카트를 보며 다들 웃음을 머금었다.

"축하드려요, 장 장군님!"

"아이고, 장군님께서 아기 물건 고르시는 거 처음 보네요."

"허허, 귀한 손주 생기셨나 봅니다!"

아기 옷, 장난감, 이불... 온통 아기 관련 물건들을 담고 계산대로 향하던 장수 영혼.

특히 손에는 귀여운 딸랑이 하나를 소중히 들고 있었다.

"이 딸랑이가 제일 마음에 드는구나. 우리 애기한테 딱이겠어." 딸랑이를 흔드니 맑고 청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그의 목걸이에 빨간불이 경광등처럼 삐삐삐 울리며 번쩍거렸다.

거대 영혼의 콧구멍에서 시뻘건 불이 푸쉬쉬하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쇼핑 카트를 밀고 거대한 발로 쇼핑몰 바닥을 내리찍더니 위로 점프했다.

쿠콰광!

천장이 뚫리며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 영혼.

'이게 몇 년 만의 호출인가...'


서울의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며 장군은 드론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삼지창과 작은 딸랑이를 들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우리 애기 물건을 고르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거대한 장군의 혼령이 폐터널 입구에 막 도착했다.


폐터널

"아니, 이게… 여기가 어디…?"

최 기사는 당황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기 손을 보고도 여기가 어디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최 기사는 엄마가 산통을 느껴 급히 부른 것을 떠올렸다. 자기 목 부분을 더듬었다. 없었다, 할아버지가 반드시 착용하고 다니라던 결계를 샤워 후 급한 호출 때문에 욕실에 두고 나온 것을 깨달았다.

겁에 질린 목소리로 최 기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 주신 결계를 놓고 온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앞 유리가 안쪽으로 터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최 기사의 상반신을 움켜쥔 것처럼, 그의 몸이 유리창째 앞으로 뜯겨 나갔다.

최 기사의 몸은 피를 흘리던 바위 부근으로 날아갔다.

할아버지가 막으려 했지만 너무 순간적으로 일이 벌어졌다.

최 기사의 허리가 부러진 듯 고꾸라졌고, 뒤이어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지는 소리, 유리 깨지는 소리,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널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자동차 문짝들이 폭발하듯 뜯겨 터널 벽을 격렬하게 강타했다.

할아버지와 아빠도 누군가 끌어당기듯 밖으로 튕겨 나갔지만, 할아버지의 손바닥이 아빠의 등에 붙으며 빨려 가는 것을 막아냈다. 할아버지의 발끝이 땅에 박히듯 중심을 잡았다.

그랬다, 아빠는 능력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빠는 우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여보!"

아빠는 나와 엄마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엄마는 상당한 고수였다. 엄마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아빠 위험 해.’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응... 으..." 하는 무력한 신음뿐이었다.

엄마는 침착했다.

그 위급한 순간에도 나를 꼭 안은 채 좌선 자세를 취했다. 단전에 기운을 모으는 게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균형자라는 걸 몰랐다.

내가 이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엄마는 그저... 엄마였다.

아기를 지키려는 본능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엄마와 내 주변에 양막이 생기더니 물이 차올랐다. 양수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물이었다.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양막은 우리 모자를 지켜 주었다.

물속에서 엄마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마치 다시 엄마 뱃속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찰랑이는 물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안전함 밖에서는...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삼촌이라 불리는 최 기사님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내가 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절망감에 빠지려던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혼령이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분노로 미쳐 날뛰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며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할아버지가 얼음처럼 차갑게 호통쳤다.

"장군!! 균형을 잃지 말거라!"

혼령의 얼굴에 타오르던 불이 급히 꺼지며 희뿌연 연기가 솟아올랐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아기 딸랑이가 시뻘겋게 달궈지더니 순식간에 시커먼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혼령은 멍하니 손바닥에 남은 재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쇼핑몰에서 정성껏 골랐던 딸랑이.

"우뤠기 줄 선물이었는데..."

시무룩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아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할아버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할아버지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목숨을 바쳐 자신의 아들과 나, 며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더 단단해지고 차가워졌다.

아빠는 분명 할아버지의 저런 표정을 이전에 결코 본 적 이 없을 것이었다.

그 순간 피 흘리던 바위 틈새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물결이 출렁였다.

엄마의 심장이 빨라졌다. 엄마도 느끼고 있었다.

저 밖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물결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차갑고, 사악하고, 끔찍한 기운.

그것이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저것이... 내가 깨운 것...'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내 작은 주먹이 떨렸다.

"으... 응..."

작은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양막이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최 기사가 쓰러져 있는 그 위로 검은 연기들이 뭉게뭉게 모이면서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사람의 형태를 이루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주변 공기는 얼음장처럼 싸늘해졌고, 무겁고 음산한 기운이 터널 안을 가득 메웠다.

"…후."

수천 년치 공기를 한꺼번에 내뱉는 것처럼, 길고 느린 숨이 터널을 가득 채웠다.

그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터널 안을 훑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오래전 봉인된 존재.

폐터널의 거대한 돌 안에 갇혀 있던 존재.

저것은 절대 깨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런데 내가... 내 울음소리가 저것을 깨웠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내 작은 주먹이 떨렸다.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그것은 나를 봤다.

나도 그것을 봤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의 보호막이 나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저것의 눈에 내가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 느끼고 있었다.

보호막 너머, 이 안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그 순간이었다.

아빠가 몸을 던졌다.

이유도 없이. 능력도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그 붉은 시선과 나 사이를 막아섰다.

붉은 눈동자가 아빠에게로 향했다.

아빠는 알고 있었다.

그 붉은 시선이 무엇을 향하는지.

막아질지 어떨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저, 나를 위해 몸을 던졌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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