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를 피해 가출 중이었다. 재수할 때 대학 안 간다고 시험을 때려치우고 다리몽둥이가 부러질까 봐
할머니 집으로 향한 도피였다.
할머니 댁은 서해 바다를 끼고 있는 낮은 언덕 위에 있었다.
집 뒤로는 밭이 펼쳐져 있었고, 고추밭과 깨밭이 이어져 있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아 배도 고프고 걱정도 되어 밖으로 나섰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고추밭과 깨밭을 지나 걷다가, 어느새 야트막한 산이긴 해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붉은 수수밭이 있었는데 밭 너머로 서해바다의 일몰을 처음 보았다.
역광으로 펼쳐지는 수수밭의 검은 실루엣,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
그리고 오렌지빛으로 일렁이던 해.
아마 그때 처음으로 ‘일몰’이라는 걸 본 것 같다.
그 색감은 아직도 내 눈에 남아 있다.
해와 바다가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고, 즉각적으로 텐션이 올라갔다. 이렇게 멋진걸 나 혼자 보고 있으려니 안타깝기까지 했다.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다 동영상이다 뭐다 해서 바로 찍어 나르고 감동도 바로 공유했겠지만
나의 첫 일몰은 글로 표현이 안될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수수밭으로 직진해서 달려갔다.
그 순간이었다.
수수의 거친 감촉이 느껴지기도 전에
어디선가 작은 모터 소리가 들렸다.
"우웅— 우우우우우우웅—"
갑자기 힘찬 소리와 함께 수수들이 하늘로 쏟아 올랐다.
이것은 무엇이지 그 짧은 순간 나의 뇌는 과부하가 걸렸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수수가 쏟아 오르다니 팝콘도 아니고 왜??
처음에는 내가 춤을 춰서 수수가 하늘로 날아오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수수 사이에서 검은 점들이 솟구쳤다.
점들이 선이 되고, 선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군집으로 치솟았다.
그것들의 정체를 인식하는 순간,
'수수가 아니고 벌레?'
무릎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나의 뇌는 살기 위해서는 무릎을 풀면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 뇌와 가장 가까운 입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으악!
저리 가라!
이 잡것들아!!!
질렀다. 또 질렀다.
나는 사지를 떨며 할머니 집으로 달렸다.
내 비명을 듣고 할머니가 맨발로 달려오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를 끌다시피 업고 내려왔다.
“여기 위험해! 우린 도망가야 돼!”
등에 업힌 가녀린 할머니는 떨어질까 봐 내 목을 어찌나 세게 끼어안으셨 던 지 숨이 턱턱 막히고 진땀이 흘렀다.
할머니 말로는 그 작은 모터 소리를 내던 놈들의 정체는 바퀴벌레였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바퀴벌레도 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훨씬 큰 존재였다는 것도.
처음 보는 일몰에 하늘을 나는 거대한 집단 바퀴벌레의 첫 경험과 함께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너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오두방정으로 귀엽게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곰이 달려오는 줄 알았단다.....
할머니는 곰처럼 먹고 놀기만 하는 이 큰손녀딸을 엄청 사랑해 주셨다. 할머니가 그리운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