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의 몽중몽(夢中夢)

by 무딘식칼


설 연휴가 끝났다. 이제 부엌일은 때려치우고 책상에 앉았다. 브런치에서 알림 없는 요 며칠이 심심했다. 오늘은 어떤 글로 알림을 많이 오게 할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겪었던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끄집어내기로 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의 붉은 함성으로 가득 찼던 2002년, 나의 방안은 다른 의미의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한참 시나리오를 쓴다고 깝치고 다니던 서른 살 무렵, 나는 LG 씽크패드 노트북을 펼쳐놓고 공포물 한 편에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다.

목표는 원대했다. 영화 <주온>처럼 무섭되, 그보다 훨씬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 "한국 귀신은 무조건 적인 복수가 아니라 반드시 사연이 있기 마련이지!"라며 복수극의 정석을 써 내려가는 초보 작가의 패기는 하늘을 찔렀다. 주인공 ‘연희’의 서사가 술술 풀릴 때면, 나는 이미 거장이라도 된 양 자아도취에 빠지곤 했다.


우리 집은 현관 바로 앞에 내 서재가 있고, 바로 옆에 안방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서재는 불투명한 유리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누가 지나가면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당시 남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벽이던 아침이던 집에 들어와서 눈이라도 잠깐 붙이라고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해줬다. 맹모삼천지교가 아니라 내조삼천지교內助三遷之敎였다.

집과 회사 거리가 고작 135미터였는데도 자주 들어오진 못했던 거 같다. 그래도 낮이고 밤이고 불쑥불쑥 들어와 침대에 피곤한 몸을 구겨 넣고는 했는데 내가 있던 없든 간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두 마리 때문에 "아빠 왔다." "나 왔어."라는 인사는 꼭 했다.

서재에서 글을 쓰다 보면 현관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그림자가 유리문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서로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 왔어"라는 짧은 인사만 나누었고, 그는 안방이나 서재방 맞은편에 있는 옷방으로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며칠째 결정적인 장면에서 막혀 끙끙대다 이른 저녁부터 잠을 청했다. 그런데 꿈속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풀리지 않던 대목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완벽하게 상영된 것이다.

"와우, 원더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곧장 서재로 달려갔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인 뒤 미친 듯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시계도 없는 방에서 오직 창밖의 서늘한 기운으로 새벽임을 짐작하며, 꿈속의 이미지가 휘발되기 전에 한 자라도 더 남기려 초집중했다. 400타 이상의 속도로 타자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담배 재를 터는 것조차 잊을 만큼 나는 글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 왔어."

건성으로 "어어" 대답을 하고 타자를 멈추지 않았다.

완전 초집중했기에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나 싶었지만 흐름을 끊을 수는 없었기에 대답만 건성으로 내뱉었는데 왼쪽어깨 쪽 방향으로 있는 미닫이 문쪽에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담배나 한 대 더 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남편이 서재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남편이 작업 중인 내 방문 앞에 서있거나 미닫이 문을 열어 인사를 한 적도 없었는데 게다가 내가 아무리 초집중을 했다고 남편이 내 등뒤에 서 있는 느낌까지 못 느낄 몸뚱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 돌아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득 발밑을 보니 우리 집 강아지들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남편이 왔다면 저놈들이 저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도저히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나 왔다고."

결국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덜 닫힌 미닫이문 틈새로,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시뻘건 눈 두 개가 세로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필로그

내가 알고 있던 욕을 다 하며 잠에서 깼다. 다행히 그것조차 꿈이었다. 너무 열중하고 쓰다 보니 책상 앞에서 잠이 들었었던 나는 과한 악몽을 꿨던 거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새벽의 서늘함과 세로로 선 붉은 눈의 잔상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10년쯤 뒤에 붉은 눈의 얼굴까지 보는 일도 생겼었다. 다음번엔 그 얘기로 돌아와야겠다.

글에 너무 깊이 매몰되면, 때로는 내가 만든 허구가 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