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자기
'기대에 어깃나지 않는 딸이 데길 바란다.'
1997년 8월 14일 자취방의 짐을 꾸리다 발견한 쪽지다.
글씨를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가 꾹꾹 눌러썼으나 획이 삐뚤빼뚤했다.
그렇잖아도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과 한없이 서럽고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이 메모를 보는 순간 내 감정의 브레이크는 고장 난 듯했다.
비 오는 여름 엉엉 울어 제끼고 있는데, 4만 5천 원에 서울에서 천안까지 이삿짐을 날라 준다는 아저씨가 왔다.
조금 일찍 부모님이 바라는 걸 눈치채고 그에 잘 맞추는 딸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말 잘 듣는'이라는 수식어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학생이나 딸내미로서는 별로 어긋나지 않았으나 내가 꼭 하려는 것과 부모님의 기대가 상충할 때는 내 의견을 꺾지 않고 관철시키는 편이었다.
대학교도 그렇게 서울로 진학하게 된 거였다.
생활비도 학비도 내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장담을 하고서.
그놈의 IMF만 아니었어도 휴학을 하지 않았을 텐데. 부모님이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한 가정이기만 했더라면...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나를 더 서럽게 했다. 부모님의 기대처럼 말 잘 듣는 딸이었으면 고생이라도 덜 했을까!
내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모습을 '의무 자기'라고 한단다. 의무 자기에 성실한 편이다.
오늘 출근길은 눈꽃이 배경이 되어 주어 눈호강을 했다. 이번 주는 계속 영하권의 날씨로 인해 추울 것이라고 한다. 눈 온 풍경이 예뻤는데, 혹시 블랙아이스 때문에 위험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지금 눈에게 의무 자기를 강요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