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 한걸음 내딛었더니 온 세상이 달라졌다.
어렵게 이직한 회사에서 성희롱이 난무하는 말들에 혼자 끙끙 앓으며 보냈던 지난 2016년 겨울, 나는 가족들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왜 혼자 앓았냐며 속상해 하던 엄마와 조용히 담배만 줄줄이 태우던 아빠 그리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오빠로부터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이다.
"안녕히계세요. 저는 퇴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훌쩍 떠났다. 평정심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진 감정들을 표출하며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동유럽 여행은 시작됐다.
카를교라고 불리는 다리는 프라하성과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로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완공된 이후에 다리 양쪽 난간에 성서 속의 인물들과 체코 성인들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카를교를 걷는 내내 거리의 악사들과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을 보며 생각했다. 카를교의 매력은 다리 자체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와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라고. 멀리서 보이는 프라하성이 점점 가까워지자 눈이 흐릿해졌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아름답다는 생각부터 하게 되니까. 그렇게 용기를 내 한걸음 내딛었더니, 온 세상이 달라졌다. 이제서야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 프라하에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거대한 트리와 밝은 불빛들, 흥얼흥얼 거리게 하는 캐롤이 크리스마스 마켓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줬다. 손가락 마디마디 저려오는 추위에도 뜨레들로 하나와 따뜻한 사과주스면 충분했다.
휘핑크림 가득 올려진 코코아 한 잔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다. 어릴 때 부터 그려왔던 크리스마스란 이런 풍경일까. 이 말도 안되는 풍경에 넋을 잃었다. 혼자 있을 때 느껴지는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지금보다 더 중요한 순간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 순간만큼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다.
다음 날 아침,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찾았다.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 실내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예술적인 천장에 이내 진정했다. 나에겐 그닥 반갑지 않은 공간이지만 독일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고 돌아 오는 게 더 후회할 것만 같아서 유명한 1L맥주를 주문했고, 무거운 맥주에 손을 덜덜 떨며 그립감만큼은 온전히 느끼고 놓아주었다. 당연히 너무 많이 남은 맥주는 옆 테이블 어르신들과 눈빛 교환으로 내 맥주를 선사했다. 이윽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한국은 급하게 발전한 것 치고 제품들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앞으로 평생 경제창출에 이바지 할 나의 미래 생각에 아늑해지더니 나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그렇다.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예정이라고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이야기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이라 가능했던 대화다. 아니었다면 낯가림이 심한 나는 도망쳤겠지.
수채화 그림 같은 데칼코마니를 볼 수 있는 곳, 오죽하면 중국에서 이 할슈타트를 통째로 복제해 자기 땅에 옮겨놓았을까 물론 안봐도 진품의 아우라는 한참 못미칠 것 같다.
15살의 내가 소중히 아껴 봤던 사운드오브뮤직, 한번 씩 꺼내보고 싶은 사진첩의 사진같은 영화다. 도레미송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간에 미라벨 정원이 나오는데 겨울이라 봄의 사랑스러운 색감은 없었지만 줄리 앤드류스를 생각하며 잠시 행복했다. 빨간머리앤에 나오는 앤처럼 대사 하나하나가 이쁘고 사랑스러운 영화, 그 곳에 내가 있다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16세기 한 부분을 뭉텅 잘라 그대로 봉인해 놓은 듯한 체스키크롬로프는 블타바강이 S자로 돌아 흐르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데 그들의 역사 지킴이 대단하다.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의 여러번 시도에도 시에서 끝끝내 허가 해주지 않는다고. 작은 마을의 확고한 신념이 내 안에 숨어있던 용기들을 스물스물 피어오르게 했다.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뤄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12월 31일이 되면 이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이한다고 한다. 사진 한 장에 담기 어려울만큼 건물의 웅장함과 아찔한 정교함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보다가 사람들의 무리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클림트의 '키스'로 유명한 벨베데레 궁전에도 갔었으나 도저히 걸어다닐 힘이 없어 근처 카페로 들어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비엔나에서 먹는 비엔나 커피는 생각보다 쓴 맛이었고, 유독 떠나기 전, 눈에 밟혔던 내 여행메이트(1편 참고) 생각에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아 긴 메세지를 써내려 갔다. 평소 혼자만의 시간을 존중해달라, 그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외쳤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떠날 필요가 없는, 같이 있음을 전제하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고맙다고.
체코의 프라하 못지 않게,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도 황홀하다. 아기자기한 프라하와는 또 다른 가슴 벅찬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세체니다리에서 해가 스물스물 넘어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다 점점 어둠으로 물들어 환골탈태하는 건물의 모습은 부다페스트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대한 다리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다보니 여행의 끝자락에 왔다. 생각지도 못한 발견에 감동했고, 행복했다.
-
몇 남지 않은 2016년의 끝자락, 책상에 엎드려 휘몰아치던 감정을 써내려 가던 중 벌떡 일어났다. 행복하게 마무리 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지금의 고단함도 지친 일상도 다 행복을 위한 저축이라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저축만 했을까. 여행하는 내내 감정들을 억누르며, 돌보지 않았던 지난 날의 나에게 미안함이 들었고, 진실된 모습을 마주할 때 마다 순간순간 고통이었지만 담담히 마주했다. 그러자 따뜻한 봄 바람이 살랑거렸다. 어제보다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탄력성이 커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