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봄날 - 봄날이 열리다

봄날의 시선 69

by 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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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한 기온을 체감하며 ‘춘분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아침저녁 추위에 목덜미가 으스스하다. 봄이 없다고 투정하는 사이 발밑에 와 있기 일쑤인 봄, 그 어김없는 규칙에 화들짝 놀라며 기꺼이 봄을 들인다.


휴대폰에 봄꽃 사진이 담겨 눈이 호강한다. 아파트 화단에 핀 동백꽃, 공원에 핀 매화, 산수유, 길섶의 봄까치꽃이다. 더 있다. 냉이와 민들레꽃이다. 성급한 민들레는 하얗게 갓털을 날리고 있었으니, 서두르는 것 같아 보는 마음 시리다.


봄은 귀하게 핀 한 송이 꽃에 몸을 기울이면서 시작한다. 뾰족한 새순 하나에 감탄한다. 길고 지루했던 무채색의 대지를 씩씩하게 뚫은 작은 꽃이 기특하다. 차가움을 딛고 나오느라 애썼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첫 꽃에 마음 쓰인다. 꽃이 감내했을 시간을 짐작하기나 할까. 예쁘고 귀한 것이 당도한 시간의 더께를 가늠할 수 있을까.


몇 종류의 봄꽃이 차례로 지고 나면 벚꽃이 핀다. 산책하면서 이맘때만큼 벚나무 가지를 올려다본 적 있을까 싶게 두 눈에 기다림이 묻어난다. 저 봉우리는 언제쯤 터지려나, 며칠이나 더 기다려야 하얗게 솟는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아이처럼 손꼽는다.


내게 벚꽃은 설렘과 그리움 이면에 슬픔이 버무려져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벚꽃의 하얀 넋두리를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다. 어느 해 부모를 모시고 가까운 곳 나들이를 나섰다, 세 자매와 함께였다. 유난히 벚꽃이 만발했다. 구름 떼 같은 벚꽃 앞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빠의 팔짱을 끼면서 더 환하게 웃어보라고, 더 가까이 서 보라고 힘껏 요청하며 봄날 오후를 보냈다. 돌이켜보니 그날이 부모와의 마지막 봄 여행이었다.


하얀 잠바를 입고 갈색 중절모자를 쓴 아빠가 흩날리는 벚꽃 앞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 송이 벚꽃 같았다. 허리 굽은 엄마가 아빠를 올려다보며 주춤주춤 자세를 곧추세운다. 우리를 향해 “괜찮냐?”라며 멋쩍어하는 표정이 분홍빛으로 환했다. ‘늙어도 예쁘구나,’ 벚꽃으로 스며든 세월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벚꽃 앞에서 많이 웃었다. 이 순간이 찬란한 선물이 되었구나 싶어 가슴 벅찼다. 지나고 보니 해마다 피는 벚꽃마저 주고 간 부모가 아니었는지 생각한다. 기억하라고, 벚꽃처럼 환하게 살라고, 혼자 살지 말고 어우러져 살아야 보기에 좋다고 말하는 듯 벚꽃은 무리 지어 필 때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벚꽃이 피면 자매들과 만나 그날의 봄 얘기를 나눈다. 시간이 흐르면 잊히기도 하는데, 벚꽃이 피는 동안 부모는 늘 새로움으로 오니, 기억과 추억이 낡지 않아 좋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인가.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했던 봄은 아니지만 그날의 봄은 다시 와 오늘의 봄이 환하다.


벚꽃은 한없이 핀다. 한없이 지고, 한없이 가볍다. 그러나 헤프지 않다. 이토록 힘센 가벼움이 있을까. 하얗게 어룽거리는 모습에 압도당한다. 쏟아질 듯 피고 지는 벚꽃 거리에 선다. 지는 꽃의 부드러움이 아찔해 잠시 눈을 감기도 한다. 투명한 빛이 와글와글 끓는다. 벚꽃이 지면 허둥거리는 마음에 거리를 헤맨다. 두두두두, 소나기처럼 왔다가 일시에 지는 냉정한 벚꽃, 이토록 어이없이 져버리다니, 일 년을 어찌 기다리나, 벚꽃은 그냥 꽃이 아니라 나에겐 약속과 같은 꽃이다.


“무사히 잘 견디다 피거라, 네가 다시 와, 하얗게 부풀면, 비로소 한 계절을 무사히 통과했음을 실감할 거야.”


봄날이 열렸다. 따사로운 빛이 어깨를 두드린다. 움츠렸던 마음의 기지개를 쭉 켠다. 봄은 마른 대지를 부추기며, 가자, 어서 봄으로 가자, 외치며 꽃으로 먼저 온다. 그중 벚꽃은 오랜 기다림에 대한 따뜻하고 다정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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