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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Apr 04. 2022

조용한 위로

짧은 그림책 한 권에서 조용한 위로를 얻게 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바로 ‘가만히 들어주었어’라는 그림책인데요,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 봅니다. 내가 위로를 받았던 적은 언제였을까 하는 물음이었죠. 평소 내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늘 남의 얘기에만 귀를 기울여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 가끔은 내 얘기도 하면서 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도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걸 나 스스로 깨닫는 것이었지요. 위로를 받는 일보다 위로하는 일이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늘 혼자서 헤쳐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힘들 때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위로하는 일이나 위로를 받는 일도 서로 준비가 되었을 때라야 그 위로의 효력이 있음을 알게 한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년 테일러는 ‘뭔가 새로운 거.’, ‘뭔가 특별한 거.’, ‘뭔가 놀~라운 거.’를 만들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만든 멋진 블록 성이 완성되었을 때 정말 뿌듯하고 만족스러웠죠.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최선을 다한 사람의 표정 아닌가요? 

그런데 훼방꾼은 늘 가까이 있는 법이죠. 느닷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순간 같은 거요. 글쎄, 까마귀 떼가 날아와 순식간에 테일러의 멋진 블록 성을 망가뜨렸지 뭐예요. ‘모든 게 무너져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테일러는 놀라고, 슬펐고, 이내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때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나는 게 우리 삶 아닌가 싶네요. 수습하기 힘든 좌절이 모여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단단해지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외로움을 견뎠던가요. 


테일러의 상황을 알아챈 닭이 나타나 “말해 봐. 말해 봐.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테일러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곰이 와서 “정말 화나겠다. 그럴 땐 소리를 질러! 크와아아아아앙!” 온몸을 다해 소리를 지르죠.

테일러는 소리 지르고 싶지 않았어요.

망가진 블록을 고쳐주겠다며 코끼리가 왔어요. “원래의 모양을 잘 떠올려 봐 봐.”

테일러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요.


하이에나도, 타조도, 캥거루, 뱀까지 나타나 웃으라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숨어버리라고, 싹싹 치워버리라고, 같이 다른 애들 거 무너뜨려 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누구와도 말이죠. 

그럴 때 있잖아요. 그 어떤 위로도, 달콤한 말도 눈에, 귀에,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때요.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했나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나요. 시간이 흐르도록, 그들의 위로가 내 안에 차오를 때까지, 혹은 비로소 곁에 있는 타인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그렇게 나를 내버려 둔 적이 있지 않았나요. 테일러처럼요.


친구들은 모두 가고 테일러 혼자 남았어요. 그래서 조용히 다가오는 토끼를 보지 못했죠. 토끼는 조금씩 다가와 테일러가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이윽고 테일러가 말했어요.

“나랑 같이 있어 줄래?” 


처음으로 테일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토끼는 가만히 들어주었어요. 테일러가 실컷 소리 지르는 것도, 모든 걸 기억해 내고 웃는 것도, 상자 속에 숨고, 상자에 블록을 다 넣어버리고, 누군가에게 복수할 계획도 가만히 들어주었어요. 토끼는 테일러의 곁을 떠나지 않았지요. 이윽고 “나, 다시 만들어볼까?” 테일러가 말했고, 토끼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다시 해 볼게, 지금 당장!” 

테일러는 자신이 만든 멋진 블록 성을 떠올리며 블록을 손에 쥐었습니다. 토끼가 함께 있었음은 물론이죠. 

이 책을 옮긴 신혜은 작가는 말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의 ’때‘에, 그 사람의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돕고자 하는 일이 또 진정 듣고 싶은 말이, 그 사람 안에서 흘러나오고, 현실’이 된다고 말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따라가며, 반응하기’.

 wait – wait – follow – respond.


이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읽는 아이마다 반응이 다 달랐어요. 


 “나 같으면 막 화를 냈을 거예요.”

 “헐, 어이없네. 날아간 까마귀를 쫓아가 때려줄 수도 없고.”

 “책을 읽고 나니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네요.”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의 기분을 살펴보는 일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근데, 토끼는 말을 못 하니까 그렇게라도 옆에 있어 준 것 아닐까요?”

 “토끼가 따뜻하게 해 주니까 테일러의 마음이 스르르 녹은 것 같아요.” 


그저 가만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처한 무거움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테일러는 상실에 대한 아픔이 생긴 아이예요. 황당하고, 어이없음으로 그만 말을 잃었고, 생각을 잊었고, 마음을 닫았어요. 그런 테일러에게 누구라도 토끼와 같은 존재가 되어 주는 일은 쉽지 않아요. 그러나 늘 거기 머물러 있음으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려주는 일은 가능할지 몰라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황과 직면하게 됩니다. 마치 테일러의 상황처럼요. 테일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동물들처럼 우리도 그런 친구나 가족, 이웃이 있지요. 하지만 위로는 내가, 혹은 상대방이 위로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품을 열고 받아들이고 전달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지켜볼 수밖에요. 그가 자신의 말을 건네 올 때까지요. 시간이 흘러 위로가 스스로 말을 걸어올 때까지요. 


나는 토끼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쉽게 위로하고, 쉽게 말하고, 쉽게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 말고 지극하게 기다려주고 내가 가진 따뜻함의 온기가 서서히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 말입니다. 가능하다면 토끼처럼 그렇게 가만히 있어 주고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으로 머물고 싶습니다. 또한 테일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기를 희망합니다. 이 책이 저에게 조용한 위로이자 따뜻한 어깨를 빌려준 책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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