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슬픔이 자라 더는 슬프지 않을 때
평범해지기로 결정하는 것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어릴 때부터 바라던 어떤 것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깨닫고, 밥벌이는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므로 생각보다 견딜만한 일임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곧 충분히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은 2022년 2월의 어느 금요일, 정신과 진료가 있었던 날이다.
"박하 씨는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그 말을 처음 들었다. 나는 항상 자신을 몽상가로 칭하곤 했고, 어떤 질문을 받아도 그런 판단이 가능할만한 대답만 골라서 했다. 어린 나에게 현실적이라는 말은 곧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것은 지루했고, 남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것들을 나도 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그에 반하는 증표를 찾기 위해 버둥거렸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내 꿈을 믿지 못하고 실패를 예언하는 말들을 비웃으며 어찌 되든 결국엔 이루어질 거라고 실낱 같은 희망을 찾고, 잃어버리고, 다시 찾으며 지내왔다. 하지만 사실 내 꿈을 가장 비웃고 전혀 믿지 않았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 맞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몽상가로 여기던 시절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사는 나의 20대를 어정쩡한 시도들로 채우게 되면 30대가 돼서 후회할 거라고 했다. 내가 꿈을 위해 잠시 희생하는 시간이라고 합리화했던 모든 시간들이 그의 입에서 한 마디로 요약됐다. '임시방편들로 메꾸어진 삶.' 아르바이트든 뭐든 겨우 벌어 겨우 풀칠하는 직업 대신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적인 반발심이 치밀었다.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문장들이 혀 끝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 변명들은 금세 휘발되었고, 그러자 그 말 속의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 보였다. 불편이 가라앉고, 의사가 건네는 적당히 건조한 문장들이 차분히 머릿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향성을 모르겠어요." 마지막 남은 불만을 참지 못하고 볼멘소리로 내뱉어버린 내게 의사는 답했다. "방향성은 돈이에요." 참 간결했다. 왜 여태 그걸 몰랐을까. 붕 뜬 꿈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임시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찾아야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 계속 나를 회의하게 만들었던 알 수 없는 느낌들의 정체가 그제야 드러났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 전문직, 대우받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안정적인 삶. 지금껏 애써 무시해왔지만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계속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추구해왔던 것들이 내 결정에 반발해 보내오고 있던 신호가 들렸다. 무언가 막이 걷힌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너머의 현실은 예상했던 차가운 회색빛의 콘크리트 세상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자아효능감이 풍부한 삶이었다. 나는 지독하게 불안한 20대 초반을 지내오면서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명확해졌다. 나는 제대로 된 커리어를 원했다. 안정적인 수입과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다. 그걸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가 뒤늦게 보였다. 방향성은 돈이고, 나는 (의사에 말에 의하면) 모든 시도가 허용되는 20대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삶(;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고, 나의 뛰어남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고,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으며, 사회적인 인정과 풍요로운 생활을 동시에 영위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길을 선택하면 된다.
그래서 현실과, 나라는 사람의 기질과, 내가 원하는 미래와, 내 객관적인 능력을 모두 고려해서 도달한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는 분명 불안정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하고,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소비하고 싶지, 생산하고 싶지는 않다. 그걸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찾아낸 분명한 결론이고, 내 안의 많은 여린 것들을 희생해 얻은 것이므로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침내 가야 할 길과 가고 싶은 길이 일치하는 지도를 손에 넣은 기분이다. 이 길을 따라서, 지루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어른답게 꾸준히 이어간다면, 그러면 나는 30대가 되었을 때 내가 가장 원하는 형태의 평화로운 삶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누군가가 물을 때에도, 담담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근사한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 내일까지 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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