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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리 Feb 11. 2022

감자 샐러드와 할머니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의 서글픔에 대하여




어느 날 아침 문득,
나 하나 정도는 거뜬히 돌보고 먹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또래 친구들이 괴상하게 여길만한 것들, 예컨대 요가를 운동이 아니라 수련이라고 믿는 일,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습관, 명상에 대해 공부하거나 남들 몰래 시를 쓰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것들이다. 그렇긴 해도 보기보다 몽상가적 기질이 부족한 사람답게 항상 어딘가 자조적인 구석을 껴안고 지낸다. 현실은 내 마음에 안개처럼 자욱이 떠있는 회의를 그대로 반영한 듯 미지근한 온도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싫어하는 걸 참고 견디다 보면 좋은 것이 찾아온다고 믿지도 않으면서 싫은 것들을 견디는 날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으며 보내는 시간들이 감당할 수 없이 축적되었다는 게 느껴질 때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해져 버린 나의 전부인 그 사람을. 내가 지닌 조각난 따뜻함의 원인이자 내가 유일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곳, 나의 할머니를 떠올리는 날들이 점점 많아진다. 어리다는 것이 변명에서 무기로 바뀐지도 꽤나 지나버린 지금, 기회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한눈판 이 시간들이 훗날 칼날이 되어 내게 돌아와 박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치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낄 수 있으니까. 내 전부라는 말을 얕은 비유나 텅 빈 과장이 아닌 진실된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조금씩 스러져가는 모습은 나를 절절히 아프게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가장 무르게 만드는 것은 사랑도, 두려움도 아닌 안쓰러움일지도 모르겠다.



  빨리 독립하는 것. 그게 언제나 나의 목표였다. 그래서 나는 늘 불안했다. 세상은 내 나이를 근거로 내게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지기를 종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쉬지 않는 것이었다.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점을 유지해야 했고, 주말에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해 돈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 소위 '도전'이라고 불리는 20대 다운 무모한 일들도 저지르는 동시에 그럴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했다. 휴식이 부족할수록 뿌듯함을 느꼈다. 통신비에서 시작해 공과금, 관리비에 이어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저글링 하는 공을 늘릴수록 놓치는 공도 늘어만 가는 것은 주변시 안에나 간신히 담겼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잘하게 되는 일들이 생겼다.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괜찮은 된장찌개를 끓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한 두부조림에서 엄마 반찬 맛이 나기 시작했고, 싱싱한 야채를 보면 건강을 챙길 기회라는 생각이 들게 됐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를 챙기는 일을 점점 잘하게 되어버렸다. 드디어 그렇게 할 수 있게 됐다는 문장이 아니라 그렇게 돼 버렸다는 말을 쓴 건 혼자 하는 일에 어쩔 수 없는 뒤따르는 서글픔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할머니의 찌개를 사랑하지만 아침은 가볍게 먹고 싶고, 그 바람에 꽤 맛있는 감자 샐러드를 어렵지 않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먹고사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조차 몰랐던 순간들이 줄어들어가면, 처음에는 조금씩 슬퍼지다가 이내 조금씩 무뎌질 것이다. 나는 그 무뎌짐이 서글프다.



  할머니께서는 일을 늘지 말고 한동안 쉬라는 말씀을 요즘도 종종 하신다. 하지만 나에게 권태로움은 곧 불안이고, 몸의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더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지낼 것이다. 당신께서 걱정하실까봐 힘든 일은 숨기고, 또 그러고 나서 몰래 힘들어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침을 거르지 않고 나를 먹이는 일이나, 나를 책임지는 일은 앞으로 점점 더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얀 머리칼만 떠올려도 가슴께를 시큰하게 만드는 그 사람이 내게 부쩍 힘들어 보인다며 그만둬도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한 마디로 나는, 많이, 괜찮아질 것이다.


  다만, 변하지 않을 것 때문에 변해갈 것들을 떠올리고 또 눈물짓는 날들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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