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을 들이는 일
식물 집사로 사는 것에 대하여
오렌지자스민. 오렌지도, 자스민도 아니지만 오렌지 같은 작고 붉은 열매가 맺히고 자스민 처럼 향긋한 우리 집 반려 식물이다. 이 사랑스러운 녀석에게 민지라는 귀여운 이름을 붙여준 건 거의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 게 뒤에서부터 읽은 그 이름(민스자-지렌오)의 앞글자를 따면 민지가 되기 때문이다. 다소 억지스럽게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지민이 아니라 민지인 것은 그저 취향의 문제라는 변명만 덧붙이겠다.
똑같이 원룸, 그러니까 부엌이 곧 거실이자 침실인 집에 살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공간에 대해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는 방이 아니라 집답게, 그것도 사는 사람의 손길과 취향이 구석구석 닿은 흔적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셀프 인테리어(라고 해봤자 가구 배치를 바꾸거나 소품을 사들이는 것이 전부이지만)에 집착 수준의 관심을 보이게 됐다.
집을 어떤 색들로 채워나갈지 컬러 팔레트를 정하는 일부터, 언젠가 모조리 갈아엎어 버리고 싶은 날에 대비해서 어떤 것과도 잘 녹아들 수 있는 소품들을 고르는 것까지. 좋아하는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실 방법을 마련하면서도 질과 가격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해야 하는지 고심하는 일도. 그 모든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고민 사이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미뤄두었던 것이 바로 초록색 생명을 집에 들이는 일이었다.
문맥에 어긋나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별명 이야기를 해야겠다. 별명이란 결국엔 추억의 조각이 되기 마련이고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장난스러운 애정이 묻어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오명에 불과한 별명 하나가 있는데, 이 사연을 풀어놓지 않고는 내가 느꼈던 과한 망설임을 설명할 수 없다. 언제까지고 숨기고 싶었던 별명은 바로 ‘선인장 살인마.’ 그렇다. 나는 선인장의 일종인 스투키를, 엄마가 공기 정화 식물이라며 보내준 그 귀여운 아이들을 말려 죽인 적이 있다. 지금 그 사건(나에겐 상당히 충격적인)을 다시 떠올리면서도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집을 조금 더 꾸미고 싶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살아있는 식물을 데려올 엄두가 나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 근처에 식물 가게가 생겨버린 것이다. 내면이 유난히 우울하고 불안한 날이었다. 아주 추운 날씨였고, 지나가다 본 가게 안에 놓인 작은 화분들은 참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한 녀석이라면 내가 책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홀린 듯 가게로 들어가 거의 고해성사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제가 식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은 스투키를 죽인 적도 있고요. 혹시 키우기 쉬운 아이 없을까요?” 사장님께서 소개해주신 식물 아이들은 하나같이 참 다정한 초록빛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으로 들어가는 내 손에 오렌지자스민 화분 하나가 들려있었다.
너무나도 약해 보이는 연둣빛 이파리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곧 헬리콥터 맘의 심정을 이해할 정도로 사랑에 빠지게 됐다.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이, 집에 식물 하나 있는 사람치고는 과한 소비를 했음을 이 시점에서 고백하는 바이다. 아침에만 잠깐 햇빛이 드는 우리 집의 특성상 일조량이 부족할 것 같아 바로 식물등을 마련하고, 그러고 나니 공간이 좁아 내가 쓰던 무드등은 치워버렸다. 거기서 멈추면 다행이었겠지만, 곧 화분 50개는 커버 가능할 만한 식물 영양제를 사다가 쌓아놓았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스레 든 생각이지만 참 유난이다 싶으면서도 이 정도는 해야 집사가 아닌가 하는 묘한 만족감도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 재미있다.
그래도 나는 이 자그마한 식물 덕에 삶에서 사랑을 느낄 영역이 한층 더 넓어졌음을 감각할 수 있고, 그로부터 감미로운 기쁨을 느낀다. 줄기 밑에서 돋아나는 자그마한 새싹과, 하루가 다르게 붉어져가는 사랑스러운 열매와, 돋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잎맥이 다 들여다 보이는 얇디 얇은 이파리들을 보며 느껴지는 이 마음을.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도 쭉 유난 떠는 식물 집사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일주일 정도 되는 일정이 생기면 민지 걱정부터 들 것이고, 나는 아침을 거르더라도 민지에게 물을 주기 위해 기꺼이 침대에서 빠져나올 것이고,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초록 생명체를 데려오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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