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사용설명서의 한계

직선의 감옥에서 '에브리웬(Everywhen)'의 바다로

by 코사인 Cosine

새벽 2시, 도시의 소음이 잦아든 시각에도 여전히 깨어 있는 것이 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다. 각, 각, 각. 건조하고 규칙적인 그 금속성의 파동은 마치 얇은 면도날처럼 시간을 잘게 썰어낸다. 우리는 그 잘려 나가는 시간의 조각들을 보며 불안을 느낀다. 1초가 지나갔다. 1분이 사라졌다. 1시간이 죽었다. 현대인에게 시간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줄어들기만 하는 잔고와 같다.


연말은 유난히 숫자가 커 보이는 계절이다.

달력의 마지막 장에 적힌 12라는 숫자는 평소와 똑같은 서체로 인쇄되어 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굵게 표시된 빨간 글씨처럼 보인다. 스마트폰 알람은 여전히 같은 시간에 울리고, 출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흔들리는데도, 마음속 어딘가는 새삼스레 이렇게 속삭인다.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도 괜찮을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에 보이지 않는 책 한 권을 쥐고 자란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인생 사용설명서: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완벽 가이드].

이 두꺼운 매뉴얼은 서구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지난 수백 년간 공들여 집필한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거대한 기계로 보았다. 기계에는 감정이 없다. 오직 입력(Input)과 출력(Output)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삶 또한 투입된 시간 대비 얼마나 많은 성과를 산출했느냐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이 대학에 가는 것이 효율적인가?", "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가?", "지금 잠을 자는 것이 낭비는 아닌가?"


우리는 삶의 모든 장면을 '기능'으로 환원시킨다. 슬픔은 신속히 처리해야 할 오류(Error)이고, 휴식은 재가동을 위한 충전(Recharging)이며, 방황은 시스템의 오작동(Bug)이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사용설명서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 '어떻게(How)' 빨리 갈 것인지는 알려주지만, 도대체 '왜(Why)' 가야 하는지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수바드라 다스는 그녀의 저서에서 우리가 맹신해 온 이 '직선적 시간관(Linear Time)'의 폭력을 고발한다. 서구 문명이 정의한 시간은 과거에서 출발하여 미래라는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화살이다. 이 화살 위에 올라탄 이상, 멈춤은 곧 죽음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퇴보이며, 옆을 보는 것은 산만함이다.


우리가 연말마다 느끼는 그 알 수 없는 우울과 조급함—"올해 나는 무엇을 이뤘는가?"라는 자책—은 바로 이 직선의 감옥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려, 인류의 오래된 지혜가 숨 쉬는 호주 원주민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인류학자 W.E.H. 스태너는 그들의 시간 개념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언어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칼같이 나누는 시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시간, '드리밍(Dreaming)'은 우리가 잠잘 때 꾸는 꿈이 아니다.

스태너는 이를 번역하기 위해 '에브리웬(Everywhen)'이라는 아름답고도 기묘한 단어를 창조해냈다.


'모든 시간(Everywhen).'


이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라. 혀끝에서 맴도는 그 맛은 직선이 아니라, 깊고 푸른 호수와 같다. 에브리웬의 세계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혹은 '공존하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당신이 붉은 대지 위에 서 있다. 당신의 발밑에는 수천 년 전 이곳을 걸었던 조상들의 발자국이 지층처럼 깔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다. 조상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땅의 주름 속에, 바람의 냄새 속에, 그리고 지금 숨 쉬고 있는 당신의 혈관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나를 지탱하고, 지금의 내 행동이 미래의 누군가에게 파동을 전한다. 모든 시간이 얽히고설켜 거대한 의미의 그물망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드리밍'이다.


사용설명서를 든 현대인은 12월 10일이 되면 달력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지나간 시간은 끝났다"고 말하며. 하지만 드리밍을 사는 사람은 12월 10일의 공기 속에 1월의 다짐과 8월의 땀방울, 그리고 다가올 내년의 희망이 함께 녹아 있음을 느낀다.


당신이 지금 '무직'이라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직선적 시간관(사용설명서)의 관점에서 당신은 '고장 난 기계'다. 생산라인에서 벗어나 멈춰 있는, 효율성이 '0'인 상태. 이력서의 공백기는 설명해야 할 변명거리가 되고, 당신은 낭비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허겁지겁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파티장에라도 나가 명함을 돌려야 할 것 같은 공포는 여기서 기인한다.


하지만 '에브리웬'의 관점에서 당신의 지금은 전혀 다르다.

당신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층이 압력을 견디며 다이아몬드를 품듯, 당신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Narrative)를 응축시키고 있다. 당신이 책상 앞에 앉아 제안서를 다듬는 이 시간은, 훗날 당신이 전문가로서 세상에 나설 그 빛나는 미래와 이미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공부, 현재의 고민, 미래의 성취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방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낡은 사용설명서를 덮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에, 매뉴얼이 아니라 '철학'이 필요하다.


시간은 1초씩 줄어드는 시한폭탄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두터워지는 지층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속도에 맞춰 째깍거리는 시계가 아니라,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은 말한다.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직선 위를 달리는 경주마는 앞만 보느라 풍경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에브리웬'의 들판에 선 사람은 안다. 내가 발 딛고 선 이 자리가 바로 과거이자 미래이며, 내가 머무는 이 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시간을 '쓴다(Spend)'고 생각하지 마라.

시간은 소비재가 아니다.


시간을 '산다(Live)'고 생각하라.

당신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당신 안에 고스란히 쌓여, 당신이라는 고유한 우주를 조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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