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마지막 장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12월 10일. 거리는 이미 점멸하는 전구들의 군무로 소란스럽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에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 있다. 이맘때가 되면 세상은 거대한 회전목마처럼 속도를 높인다. 누군가는 술잔을 부딪치며 한 해의 성취를 축하하고, 누군가는 그 화려한 불빛 아래서 자신이 도태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이 짧은 진동과 함께 몸을 떨었다. 화면 위로 떠오른 것은 연말 파티 초대장이었다.
"오랜만이야! 다들 모이기로 했어. 너도 올 거지?"
손가락 끝이 화면 위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 찰나의 망설임 속에는 수만 가지의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가야 할까? 가서 "나 잘 지내고 있어"라고, 비록 지금은 소속된 곳이 없지만 나는 괜찮다고,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여야 할까? 그곳에 가면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인연이, 어쩌면 나를 구원해 줄 동아줄 같은 기회가 그 술잔들 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소위 말하는 '네트워킹'이라는 명분은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액정의 불빛이 책상 바닥으로 사그라들자, 방 안은 다시금 고요한 어둠에 잠겼다.
나를 망설이게 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이질감이었다. 세상이 정해놓은 시간의 속도와 내 심장이 뛰는 속도가 다르다는, 아주 본원적인 감각. 사람들이 '시간을 잘 쓴다'고 믿으며 부지런히 건배사를 외칠 때, 나는 그 소음 속에서 오히려 내 시간이 증발해 버릴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수바드라 다스는 그녀의 책에서 서구의 시간이란 '직선'이라고 했다. 과거에서 미래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화살. 그 화살 위에 올라탄 현대인들은 잠시라도 멈추면 추락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앨리스의 붉은 여왕처럼,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미친 듯이 달려야 하는 세상. 파티장에 가는 행위가 어쩌면 그 '달리기'의 연장선은 아닐까. 내가 살아있음을, 잊히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달리기가 아니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영화 《덤 머니》의 키스 길이 떠올랐다. 월스트리트라는 거대한 자본의 파도 앞에서도, 계좌에 수백억이라는 숫자가 찍히는 비현실적인 순간에도, 그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대신 운동화 끈을 묶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트랙.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그 고독한 달리기.
그에게 트랙은 도피처가 아니었다.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롯이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성역이 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폐가 타들어 가는 그 극한의 순간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진실이 있다. 쾌락은 휘발되지만, 고통과 인내로 다져진 확신은 뼈에 새겨진다.
지금 나의 방은 그 빈 트랙과 같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얀 화면 위에는 내가 지난 몇 달간, 아니 내 인생 전체를 걸고 다듬어 온 제안서가 숨을 고르고 있다. [K-뷰티와 AI의 결합, 그리고 새로운 비전]. 이것은 단순한 취업 지원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써달라고 애원하는 종이 뭉치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선언이자, 내가 세상과 맺고 싶은 관계의 청사진이며, 훗날 나의 '헤리티지'가 될 씨앗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보며 '무직'이라 부를지 모른다. 소속된 회사가 없으니 명함도, 직함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 활주로 끝에서 엔진을 예열하고 있는 '출격 대기' 상태라는 것을.
'드리밍(Dreaming)'.
호주 원주민들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Everywhen)'이 공존하는 웅덩이와 같다고 했다. 조상들의 영웅적 행위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대지 위에 살아 숨 쉬듯, 내가 지금 이 고독한 방에서 써 내려가는 문장들은 미래의 나와 이미 연결되어 있다. 오늘 내가 파티장의 소음 대신 선택한 이 침묵은, 훗날 내가 전문가로서 세상에 내놓을 당당한 목소리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플라스틱 자판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스타트 라인에서 트랙의 질감을 느끼듯.
의무감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니, 비로소 내가 보인다.
상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 철학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남들이 만들어놓은 유행을 쫓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고유한 'Vibe'로 공간을 장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화려한 조명 아래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바로 이런 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텅 빈 트랙 위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는 자들 중에서 탄생한다.
오늘 밤, 나는 세상의 시계가 가리키는 12월 10일의 파티장에 가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나의 시간, 나의 '에브리웬'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제안서는 거의 완성되었다.
이제,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내려갈 차례다.
빈 트랙 위에, 총성은 이미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