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 부드러운 냉소

by hari

오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창백한 색에 잔잔하고 차분한 분홍빛이 감돌았지만 연약하지는 않았다. 휘청휘청 연약하게 걸었지만 누구도 만만하게 그것을 건드리지는 못할 이미지였다. 평소 내가 생각한 보랏빛이나 푸른빛의 이미지와는 상이했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잔잔하게 겉도는 것들이 더욱 강한 힘을 지닌 것 같다.

그것은 ‘냉소’라는 것과 관련된 것 같았다. 냉소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 쌀쌀한 태도로 비웃음. 또는 그런 웃음.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 이미지는 ‘쌀쌀한 태도’까지는 맞고 ‘비웃음’과는 조금은 달랐다. 비웃는다는 표현 대신 조금 더 부드러운 기운이었다.

‘부드럽다.’라는 단어가 요즘의 키워드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부드러움은 뿌옇고 광택이 없는 은은한 느낌인데 그것은 차가움과 따뜻함의 이분법적인 의미로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개의 특성이 다 들어가 있거나 혹은 두 개의 특성이 다 제거되어 있는 기운일 수도 있겠다.

부드러움과 냉소-어떻게 보면 차갑게 느껴지겠지?-가 결합되면? 아주 독특한 결합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결합될 수 있다는 걸 느낀 건 바로 엊그제였다. 그 이미지와 분위기는 너무나 독특하여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사랑의 기운도, 섹슈얼한 느낌도 아니었다. 소유적인 욕망도 아니었으며 멋있는 감각도 아니었다. 비가 온 축축한 땅 위에 있는 눈빛이었다. 상대를 노려보았지만 거만하지 않았고 어리거나 성숙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시적인 이미지로는 검은색이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잔잔한 회색에 가까웠다. 그것은 상대를 내리 깔아 보지만 입은 아주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말을 수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지능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무시보다는 무덤덤하게 반응한다는 말이 더 낫겠다.

게으르지만 절대로 느리게 걷지 않았고 성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어리지도 않았다. 차가웠지만 상대의 말을 잊지는 않았고 놀리는 것 같지만 가식적이지 않았다.

분명히 냉소적인 이미지였지만 아주 부드러워 마치 그 부드러움의 모순적인 눈빛이 꿈속 한 장면처럼 지나간 것 같았다.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었다면 하루 종일 틀어놓고 보았을 것 같다. 잔잔하지만 충격적인 장면을 본 듯. 그것이 나를 향한 눈빛이었다면 아주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모순적인 여러 가지 것들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차분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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