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t tout. 그게 전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사랑했다. 몇 개월 안 된 아이가 색연필을 들고 집중해서 색칠을 했다. 그 사진을 보면 아직도 신기하다.
중학생 때에는 직접 미술학원에 찾아가서 수업에 등록하기도 했다. 말끔하고 감각적인 곳이었는데, 학생이 거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그곳에서 밤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선생님과 함께 퇴근했다.
우연히 예고에 들어갔다. 나는 인문계에 가서 좋은 대학을 가서 취직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예고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다가, 문득 친구의 한국화실을 들어갔는데, 그 먹 냄새와 동양화의 장미가 나를 사로잡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그 한 순간이 나에게 커다랬는지, 엄마 아빠에게 동양화로 전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아빠는 나중에 뭐 먹고 살거냐며 굉장히 심하게 반대하셨다. 그리고 나는 엄마카드로 모든 동양화 재료를 다 샀다.
어쩌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정말로 더욱 어쩌면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순간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알고보니 그것보다 더 커다란 환희를 위한 길들이 내 앞에 펼쳐지곤 했다.
작년에는 주구장창 여행하고 그림을 그렸다. 하루에 이만보 삼만보씩 걸어다녔다. 원래 하얀 피부인데 황인이 될 정도로 많이 싸돌아다녔다.
사실 작년에는 안정적이고 내가 좋아할 일을 빨리 찾아서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는데, 일을 자꾸만 그만 관두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여행을 갔고, 그럴 때마다 내가 일을 할 때 느낄 수 없는 순수한 행복감을 느꼈다. 정말 행복했다. 막막하면서 행복했다.
이번년도에는 왠지 느낌이 해외에 많이 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웬 걸. 코로나가 터져버렸고 나는 꼼짝없이 한국에만 있어야 했다.
사실 어느 정도 다행인 건 있다. 그림을 그리고 타투를 하고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인 것 같다. 삶이 이전보다 훨씬 간소하고 간단하고 단순해졌다. 매일 그림만 그리는 것 같다.
그러다 최근 들어 그림 그리는 것에 약간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아빠의 말에 흔들렸었다. 아빠는 자신이 흔들리는 주제를 남에게 전파시키곤 한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리고 나는 또 흔들렸고 지금은 꽤 괜찮아졌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자식에게 투사시킨다. 나는 그것들을 들으며 흡수시키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리 부모님의 자식이더라도 당신들의 소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당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성취하거나 이룬다는 것 자체로 판단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마음가짐 자체를 뿌리치고 싶다는 게 더 크다. '내가 해봤는데 안 돼' '어쩔 수 없이 인생은 힘든거야. 다 힘들어. 다 그래.' 이런 부모님의 체념어투를 진절머리나게 들었었는데 들을 때마다 기분이 참 별로다. 그리고 굳이 그걸 내 뼛 속으로 새겨서 내 무의식에 투사시키고 싶지 않다. 하물며 정말로 그렇더라도 내 인생에 굴복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인 뒤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에는 그럴만한 가치와 능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 아빠의 전화를 받고 나는 무력해졌었다. 내 미래에 대하여 더 불확실해 졌었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림을 그만 둘 거야?
아니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아직도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족이나 혹은 다른사람의 판단으로 인하여 체념하고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내 삶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다. 나 스스로로 살지 않을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리고 요즘에는 다시 페인팅을 시작했다. 타투 도안 위주로 그리다가 페인팅을 하니까 다시 순수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아 참 좋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최선의 아름다움은 삶에 대한 순수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 것 같다. 그게 본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내 안의 악마를 인정하면서 말이다.)
작업실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림들이 화사하고 밝은 에너지로 차오르는 것 같아 좋다. 사실 전시도 못하고 그림을 활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냥 그린다는 것 차제가 좋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