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과 망각
1.
씀의 탄생과 망각의 선택
2015년 겨울. 과거.
타인이 나에게 돈을 쓰라고 건네주었다.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기 전 내 방안이 훤히 보이는 기억
감고 있는 눈앞에 두려운 기억이 던져져 있었다.
고스란히
내 손은 돈을 쥐고 한 번도 펴지 못했다. 돈을 쥔 손으로 종이를 내리 쥐었다.
강박은,
넓고 긴 강처럼 흐르다 좁은 곳에 도달하게 된 넘치는 물과 같은 것.
어린아이들이 내 방의 문을 오가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그들이 속삭이고 있는 추임새들을 썼다. 쓰인 추임새들은 아팠다. 적혀있는 글들을 암기하였다.
머리를 박다가 기억에 박혔다. 과거의 채찍은 속 안의 쓰림이 되어 현재를 짓이겼다. 거대한 진물이 뿜어져 나왔다.
별안간 내게 떠안겨준 순간들을 써 내렸고 고통은 질질 흘렀다.
나의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고 아픈 기억들의 탄생이었다. 나는 표정을 얻었다. 가끔 텅 빈 공중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미래를 잃어버린 것 마냥 슬픈 메아리를 불러 일으켰다.
쓰고 있는 마음의 파편들은 내 속 안에 있는 두려운 절벽들에 부딪혔고 나는 울부짖으며 메아리를 토해냈다.
그것이 나의 표정이다.
파편화 된 표정을 볼 때마다 그들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들고 쓰기 시작했다. 기억을 썼고 감각을 쓰다가 감정이 쓰라렸다. 쓰다듬었던 감촉을 재빨리 적었다.
개같이 벌어서 사람답게 쓰지 못하고 내 손 안에 있는 구더기들을 꽉 움켜쥐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다분한 것들에 의해 움츠러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쇠약해진 단어를 줄곧 써왔다.
그리고 다 버렸다. 현재.
나는 쓰지 않는다. 쓸데없는 망각의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쓰디쓴 위액이 나오지 않고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뭉개지는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
기억을 버린다는 건 씀의 포기와도 비슷한 짓이지만 나는 아직도 쓰고 있다. 마음이 쓰라리지 않는다. 과거, 섬세한 감각들을 포기하지 못한 나와 분리된 마냥 ‘현재의 나’가 과거의 그녀를 관조하고 있다.
2.
측은하고 아름다운 씀에 대한 상상
차분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두 손가락에서는 은은한 담배향이 풍겨져 나왔고 약지의 손금은 침묵했다. 잔선들만 약지를 이루었다. 많은 정물과 타인들이 지나간 자리이기에 손금이 머물 수 없는 약지였다. 그 약지 사이로 연필을 쥐기도 하였으며 타인의 체액이 섞기도 하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주목받기를 좋아했지만 즐기지는 않았기에 관심이 있는 장소를 피하고 방구석에 앉아 수줍게 웃곤 하였다. 그녀는 남들의 시선에 민감했지만 제멋대로 행동하였고 타인들을 사랑했지만 혼자 있는 걸 더 편하게 여기는 모순이었다.
제대로 된 사랑을 소망했지만 제대로 된 사랑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였고(그리고 제대로 된 사랑이라는 건 없는 환상일 지도 모른다.) 격렬한 성관계를 마친 뒤 은은하게 풍겨오던 감정에 매혹되어 곧장 집으로 달려가 그 감정을 쓰곤 하였던 그녀였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앞서 행하였던 성관계가 추악해 보이건 아름답게 보이건 그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모든 관계가 종결이 난 후 덤덤해진 대기 속에서 사랑스러운 표정을 읽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그 기억들이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전에 새벽에 정사를 나눈 곳을 탈출하여 방구석에 쳐 박혀 서로의 표정의 감정을 써 내렸다.
그녀는 표정이 곧은 남자를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 사랑스러움을 잊지 않으려 바동거리며 그들의 표정을 쓰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상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랑스럽고 측은하기도 한 상상이었다. 그녀가 글로 담지 못한 그들의 표정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S라는 남자는 그녀가 정사 도중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S를 바라보는 표정을 본다. 그리고 S는 그녀의 표정이 아름답고 귀엽다고 느낀다. 그 느낌은 기억이 되어 안 보이는 종이에 적혀진다. 종이에 적혀진 내용은 구체적이지 않고 그저 ‘S’라는 이름으로만 적혀진다.
이런 식으로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느낌들이 종이에 적혀진다. 그들의 이름만 적혀지는 식으로 말이다. 후에 무수히 많은 이름들이 종이에 적혀질 것이고 그녀는 그 종이를 바라보며 자신이 궁금하다고 느낀 이름을 클릭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S라는 이름을 클릭하고 클릭한 내용에는 그녀의 표정이 구체적으로 써 있다. 타인을 의식하는 처절한 방식의 상상이다.
그리고 그녀는 쓰인 기억에 관한 측은한 상상을 멈춘다. 가장 행복할 때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소망처럼 그 상상에 대하여 가장 많은 쾌감을 느꼈을 때 그녀는 곧장 상상을 멈춘다. 굉장한 쓸쓸함이 몰려져 왔다. 아주 많은 타인들을 지나친 것에 대한 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