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폴리나
*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우주, 이 메타포를 너무 과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200년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한 예술 작품에는 허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 차라리 빈틈을 인정하고 우주를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 우주 안에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 베토벤, 사유와 열정의 오선지에 우주를 그리다.
어떤 것을 완벽하게 해내고자 하는 것은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구에서부터 비롯되고 무언가를 완벽하게 잘 하고 싶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완벽하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가능한 것일까?
완벽함이라는 건 인간이라는 인격체에 부여하기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특질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시각 속에서 완벽은 지금 이 상태로 충분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 지금 이 상태로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가 부족해서 공부를 더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쌓고자 하고 더 많은 명성,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 무언가를 더 탐구하고자 하는 행위는 건강해 보이지만 결국에 그런 모든 것들을 다 가지더라도 부족한 나 자신으로 남기 쉽다.
대신 지금 이 상태의 불완전함을 바라보고 모든 것들이 다 긍정적이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고, 현상이 지닌 모순 지점과 불완전성, 실패, 견고하지 못함, 누군가에게 지는 행위 등이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 중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완벽하게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다. 불완전함도 완전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존재해야지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한 감각을 지닐 수 있고, 우리의 삶은 그 불완전함을 배우기 위하여 다른 방향성과 변화를 통해 발전할 수 있다. 모든 결핍이 메워졌을 때야 비로소 완벽해 지는 것이 아니라 결핍 자체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폴리나>에서 주인공 폴리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발레를 하기 위하여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배운다. 발레라는 장르 특성은 완벽함을 추구하며, 마치 꿈 속에 나올법한 동작들과 상승적인 동작들이 주를 이룬다. 즉, 어쩌면 이중성이 동시에 동반되는 ‘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꿈속의 것들, 혹은 우리가 추구하는 아주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기 힘든 이유 또한, 적어도 발레의 장점 중 하나는 균형과 중도에 있기도 하다.
발레리나는 완벽을 위하여 수도 없이 반복을 가한다. 러프한 움직임 대신 완벽하게 정확한 안무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 더 잘하고 완벽한 춤사위를 보여줄 것. 그것은 이 영화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관객에게는 아름다움만 전해야 해.”
폴리나 또한 그런 움직임을 위하여 춤을 추지만, 결국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춤을 사랑하는 동작 자체는 현대무용과 더 잘 어우러진다. 발레 아카데미에서 수업이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을 흩뿌리기도 하고 바닥에서부터 비롯된 춤사위들, 어떠한 정형적 안무가 있어서 추는 춤이 아니라 지금의 즉흥성을 토대로 진심으로 기쁨에서부터 비롯된 움직임들, 그것은 어떠한 장르라는 특성을 말하지 않고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지 않는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무언가의 욕망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을 기반에 두며, 너무 현실적인 춤사위이기에 우리가 지닌 모든 특성들을 인정하며 바라볼 수 있는 춤사위일 것이다.
그녀는 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에 합격하지만, 결국에 프랑스인 남자친구를 따라서 엑상 프로방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현대무용을 추기 시작한다.
이 때에 그녀의 집안 사정을 무너져 내리게 되고 아버지 또한 돌아가시게 된다.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동시에 자신이 잘 해야지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부담감에 그녀는 언제나 남아서 연습하며 자신이 완벽하게 해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본 안무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예쁜 무용수는 필요 없어. 난 네 춤이 보고 싶어. 예쁜 거 말고 진실한 모습을 모여야 해. 누군가를 그리워한 적 있어?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를 느낀 적 있냐고. 내 작품은 그림움을 담고 있어. 너 자신과 작품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고 주위도 둘러봐. 소냐는 아드리앵을 보고 듣고 느껴. 무대에서는 그런 모습이 다 보이거든. 예술가라면 관찰할 줄도 알아야 해.”
그녀는 결국 그 무용단에서 나오게 되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밖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삶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깊숙한 절망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떠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아프다고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 또한 느끼며,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기쁨 또한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순간들이 지속되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새로운 안무가를 만나서 새로운 춤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동물적 본능에서부터 비롯된 움직임이기도 한데,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움직임,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몸을 실현시키고자 하는지에서부터 비롯된 움직임, 진실성에서부터 비롯된 움직임이다.
폴리나는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안무가인 파트너와 함께 산책을 하며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람과 조명, 그 시간의 질감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것을 새로운 안무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느꼈던 절망감, 노숙자에서부터 관찰한 절망의 움직임, 지하보도에서 친구들이 부둥켜 껴안으며 서로의 만남에 대해 기쁨을 표현하는 움직임, 지극히 현실에 기반을 둔 사람들의 여러 움직임들을 관찰한 것들을 기억해내며 안무를 만들어 낸다.
진정으로 느낀다는 건 무엇일까? 감각한다는 건 그 사람 자체가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과 감정이 그 사람 자체를 설명한다는 의미도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감각을 스스로 했을 때 그것이 느낌으로 실현되고 그 느낌 자체가 그 사람의 인생의 한 부분이 된다. 그 사람의 인생의 한 부분은 바로 그 사람이 직접 경험한 무엇이 되고 직접 경험한 무엇은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독보적이고 독립적으로 그 사람의 기억과 그 사람의 경험으로 남아서 그 사람의 일부로 실현되고 존재한다. 그것이 정말로 그 사람이 지닌 그 사람만의 주체적인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만 창작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바로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것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안무가의 역할이자 창작자의 역할 중 일부일 것이다.
어떠한 것을 감각한다는 건 타인의 시선에 기반하지 않고 온전히 내면의 시선에 기반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진실인가?”에 기반하는 것인데 그것은 주관성도 아니고 객관성도 아니다. 어쩌면 객관성이라는 사실에 기반한 것들 또한 완벽하게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내면의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이 이중적인 특질을 뛰어넘어서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 모든 사람들의 연결성에도 집중할 수 있는데, 스스로 느낀 것, 스스로 감각해서 발현된 어떠한 결과물들 또한 결국 다른 이들도 지속적으로 느끼고 감각한 것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기에 우리는 공감이라는 진실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과 그러한 삶의 양식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꾸밈없는 진실을 발견하고 그러한 작품 속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러한 양식에서부터 좋다는 감흥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 모든 창작적 행위는 그것을 잘 해내고 그것을 완벽히 해낼 수 있는 것에 앞장서서 이루어내는 방식보다는, 자신이 무언가를 느끼고 몸이 무언가를 느끼는지에 대하여, 그것을 어떠한 방식과 어떠한 시각적 특성과 움직임, 청각적 특성으로 발현시킬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연결짓고 싶은지에 대한 진실성에 대한 고찰, 그리고 자연스럽게 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서부터 비롯된 본능성이 그 작품을 생생하게 살아있게 해준다. 이러한 것의 초안에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는 반복과 성실성과 밀도감이 바로 작품의 완성도와 완벽함을 만들어낸다. 즉 동일한 완벽함이더라도 어떠한 방식에서부터 출발했느냐가 그 사람이 작품을 완성시켜냈을 때 만족할 수 있는지 혹은 결핍감을 메우지 못하는지 이 이중성을 결정시키기도 한다.
푤리나는 결국 파트너 안무가와 함께 자신이 항구에서 춘 스스로의 인생의 춤을 실현시키게 되고 영화는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당신은 어떠한 삶의 질감을 가지고 어떠한 삶의 결을 지니는가? 그것의 내용과는 관계 없이 그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삶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