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에서 발견한 미술적 언어와 아름다움> - 박하리
“La beauté pure n'a besoin d'aucun ornement et se suffit à elle-même.순수한 아름다움은 어떠한 장식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충분하다.“
아름답다는 건 무엇일까?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는 많은 철학서에서 논의가 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주관성이나 혹은 문화적인 관점 등에서부터 아름다움을 감각해 낼 수 있다. 또한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전통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고 오래된 것이라는 편협한 관점도 있지만, 절제됨 속에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세련됨과, 하나의 형식 안에서부터 개인의 변화를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서울 남산 국악당에서 개최된 <창무 국제 공연 예술제>에서 8월 30일 19:30에 <8대 중견 춤꾼들의 옛춤 대화>라는 공연이 개최되었다. 그 공연에서 관객은 무용수의 움직임 뿐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감각할 수 있고, 또한 그 속에서 미술적 언어를 발견해낼 수 있다.
이 공연에서는 총 8개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 중 “이주희 <오복춤>, 김미자 <승무>, 손미정 <숨>(김매자류 산조), 임수정<진도북춤>”에 집중하여 어떠한 미술적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지를 서술할 것이다.
우선 이주희 <오복춤>에서부터 의상의 색감, 무용수의 굵고 둔탁하며 강한 힘의 움직임에서부터 ‘최욱경 <무제 1977>, <레다와 백조>, 로버트 마더웰 <open number 17>’이라는 작품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무용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에너지적(생물학적 성별의 관점이 아닌 에너지적인 관점)인 강한 힘을 지녔는데, 이는 최욱경, 즉 여성인 화가 안에 있는 강하고 힘 있는 남성에너지적인 필력과 맞닿아 있다. 무용수는 북을 치는 것에 있어서 강한 직선적 에너지 혹은 반복적인 나선형 형태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속에 있는 에너지 자체는 굉장히 둔탁하고 검정색의 커다란 색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이것은 미술에서 수묵화 기법이나 혹은 수묵 기법을 차용한 작가들을 연상시킨다. 풀어 설명하자면, 그 작품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 힘을 어떻게 한 번에 한 획으로 이끌어낼지가 주된 요소이기에, 많은 수행을 거쳐 한 획을 이루어내는 수묵화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또한 연상시킬 수 있었는데, 북으로 둘러 쌓인 사각형 공간 속에서 그 공간, 즉 ‘제약된 틀’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서 선적 에너지가 공연장 전체를 압도시키는 듯한 이미지를 자아냈다는 것에서부터 게르니카의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성 또한 발견한 수 있다. 그러한 강인한 힘과 울림, 반복적인 밀도감 있는 수묵화 기법과 같은 커다란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웅장한 검은 빛깔의 아름다움을 감각해 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김미자 <승무>와 박노수화백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마치 한국화의 하얀 호분의 느낌을 자아내는 공연이다. 즉, 흰 색의 절제되며 유연한 움직임 자체에서부터 이끌어내는 아이러니한 그로테스크함 뿐 아니라, 마치 바닥에 누워진 새 같은 느낌을 얻어낼 수 있는 공연이다. 또한 소복히 옆으로 난 구름이 살랑살랑 바람을 타며 춤추듯 아름다운 모양새를 얻어낼 수 있는 공연이다. 이것은 박노수화백의 서정적인 파란, 흰색의 느낌과 맞닿아 있으며, 한국화적인 감정의 양식 또한 관람객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화는 한 획으로 선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품은 작가의 호흡법과 감정 상태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어쩌면 작가의 감정이 정말 고스란히 실릴 수 있는 게 한국화의 매력인데, 승무 또한 서정적이면서도 슬픈 느낌을 자아내다가도, 부드럽고 감정적이며 기쁜 감정 또한 감각해 낼 수 있는 작품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화의 채색화가 한 번에 이루어진 게 아닌, 여러 번의 겹겹이 쌓여진 물감의 층으로부터 이루어진 밀도감에서부터 자아낸 깊이를 발견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무용수의 섬세하고도 긴 선의 흐름들이 그녀의 작업에 대한 밀도감을 서술하는 작품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하얗고 파란 색채감, 무용수의 절제되면서 부드러운 흐름 등에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서정적이면서도 감정에 충실한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이다.
다음으로 손미정 <숨>(김매자류 산조)에서는 이수경 작가의 섬세함과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무용수는 마치 바람을 어루만지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는 이수경 작가의 영상 작품 속에서 관람객을 치유하고자 하는 치유적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심상을 이루어 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친절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움직임은 깨진 마음을 가장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치유하며 붙인 이수경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으로 비유할 수 있다. 즉, 이 작품 속에서는 길고 가는 섬세한 선 뿐 아니라, 따뜻하고 향기로운 움직임의 아름다움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수정 <진도북춤>에서부터 라울 뒤피의 <전기 요정>이라는 작품을 비유할 수 있다. 프랑스의 국민화가인 라울뒤피는 주로 즐거움, 감각의 기쁨 등의 소재로 작품을 행하였는데, 이 무용 작품 또한 춤을 추는 원동, 즉 순수한 기쁨에 대하여 다시금 상기시키고 고찰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갖춘 작품이다.
무용수는 공연을 하며 억지로 미소짓는 것이 아닌, 기쁨의 에너지로부터 일어나는 생동적인 에너지를 품고 그것을 분출해 냈는데, 그러한 자연스러운 흐름 자체가 음악을 하시는 분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작품이다. 즉, 이 작품은 무용수가 직접 몸을 감각하고, 몸으로 사고하며, 기쁨이라는 감정적 역할에 충실한, 즉, 예술에 있어서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힘인 행복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의 정신적인 역할에 대하여 서술한 작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풍부한 색채적 요소가 뿜어 나오는데, 라울뒤피는 아주 풍부하며 많은 색상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색감을 조화롭고 기쁘게 풀어냈다는 것으로부터 어린아이의 순수성의 자유함과 기쁨을 표현해내곤 했다. 임수정의 <진도 북춤> 또한 마치 인간이 가장 순수하고 본래 그 상태 속에서 나오는 지복을 표현한 듯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이다.
세상에 똑같은 순간이 없듯, 사람 또한 똑같은 사람이 없으며, 움직임 또한 완벽하게 똑같은 움직임이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 또한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으며, 사회적 기준의 정의인 ‘사회적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버리고, 순수하게 본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할 수 있는 움직임이야 말로 최고의 순수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장식적 요소로 자신의 것을 감추기 보다는, 떳떳하게 본인의 개성을 드러냈을 때 더욱 빛날 것이다.
<창무, 8대 중견 춤꾼들의 옛춤 대화>에서는 전통적인 춤사위와 더불어, 그 흐름에 맞추어 개인이라는 무용수의 성향과 감정, 감각을 온전히 담아냈다는 것에서부터 미술적인 아름다움과 개인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해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