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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겪어 내야 할 무언가.

by hari


요즘에는 평생 그림을 그릴 걸 염두해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항상 했던 생각이었지만 항상 했던 생각이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바와 목표하고자 하는 바가 년 단위로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목표에 대한 갈등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그것을 이루어 나가려고 분투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어차피 나는 평생 그림을 그릴 사람인데 무언가를 분투하고 갈망하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나 싶어서 템포를 좀 더 느리게 조정했다.

마라톤 하는 사람처럼 살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오래 쉬어도 지치고 너무 쉬지 않아도 지치니 그 중간의 지점을 찾고 있다.

나는 중용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그냥 똑같이 그림그리고 운동하는 것 밖에 없다.

작년에는 지금껏 내가 살면서 느껴본 것 중에서 가장 큰 것들이 많이 다가왔는데, 그렇기에 많은 것이 이벤트 같았다. 정말 많은 관심과 정말 많은 사랑, 그리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은 다 가졌다.

그렇게 다 가져보니 문득 느낀 건 다 가져보니 더 높은 걸 원하고 그 갈망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다 버렸다.

다 버리고 남겨진 걸 바라보니 그림과 운동밖에 없다.

그건 여전히 목적이 없다. 물론 목적과 목표는 있어도 그런것들이 없어도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줄 것들이고 내가 보호해줄 것들이다.

많은 것들에는 이름표가 있다. 나도 정말 많은 이름표를 가지고 살고 있고 누군가가 나에게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그런 이름표가 불편하기도 하고 혹은 일부러 붙이려고 했던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사람을 깊게 들여다 보았을 때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이름표 이상의 어떠한 것들은 존재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떠한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인성이 좋을 수도 있고 성실할 수도 있고 언제나 배려심이 많을 수도 있고 꾸준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잘 하지 않아도 열정적일 수도 있고 몰입하는 능력이 있고 개성있게 사고할 수도 있다.

사실 그것이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 많은 이름표가 지금 당장 없더라도 저런 내적 가치를 가지고 그것을 잃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이름표도 가질 수 있고 버릴 수도 있다.

그게 자유다. 그리고 그게 책임이기도 하다.


사회에서는 반대로 가르친다. 이름표를 먼저 가지면 내적 가치를 얻으리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확실히 반대다. 이름표를 버릴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는 내적가치를 얻으면 훨씬 더 멀리 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를 수용하되 사회를 버릴 줄도 알아야 하며, 사회에서 이방인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

멀리가는 사람은 고독할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 많은 공부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많은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많이 버릴 수록 많이 획득한다. 하지만 그 획득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눈, 혹은 사회의 기준치에 멀어진 사람이든 혹은 가까워진 사람이든,

자신의 가치가 어떠한 상황에서든 똑바로 스스로의 마음 속에 중심잡혀 있다는 걸 알기에

어떠한 것을 충족하려고 하지도 않고 회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좁고 곧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을 뿐, 그것을 설득하려고 하지도, 증명하지도 않는다.

우리 존재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