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많이 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사정이 있었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어머니의 성향을 대입해서 보았는데 어렸을 때 받았던 강압적인 교육이 본인에게 큰 상처였는데, 결국 주체적이고 돌직구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본인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건 자신의 엄마였다.
어떤 이의 볼에는 보이지 않는 멍이 있었다는 표현이 좋았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사람의 볼에 보이지 않는 멍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고 싶어도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가 말없이 길을 걷다가 문득 손을 잡았는데, 이태원의 한 중심에서 우리 둘만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이었는지 혹은 애착이었는진 모르겠지만 그 때 당시의 느낌은 많은 것들이 그 사람의 눈 속에만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친구는 상대방을 거절하면서 소유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완벽한 소유는 아니고 그저 곁에 떠나지 못하게만 두고 싶어했다. 회피와 방어기제가 함께 있었기에 사랑을 주면서도 주지 못했다.
어떤 친구는 상대방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말로만 떠나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지극 정성이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어떤 친구는 본인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을 이루고싶다는 욕망과 그 조건에 충족되는 커리어우먼을 찾는 것만 같았다. 사랑을 하는 본인의 모습에 집착했다. 그 아이는 좋은 남자여야만 했다.
그저 내 판단들이지만 결국 완벽한 형태의 사랑은 아니었던 기이한 모습들을 많이 관찰해 온 게 신기했다. 나도 저렇게 누군가를 그리워한 적이 있을까?
애처로울정도로 그리워 했는데 결국 기다려보니 그 사람은 내 곁에 언제든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가장 힘든 시기때에 항상 의지하고 싶었던 존재였는데 회피형이어서 힘들었지만 결국 다시 생각해보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니 그 사람도 스스로 힘든 시기였다. 그런 찰나에 재잘거리는 나라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꾸만 조잘조잘 따라다니니 그게 좋았나보다.
그 때의 나를 생각해하며 내가 제일 해주고 싶은 말은 “네 인생을 살아.” 였다. 의외의 말이었는데,
다시 돌아가도 그 모든 것을 겪을 것이냐는 질문에,
내가 너무나 겪기 싫었던 아픔도 사실 쐐기를 통해서 내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과거의 고통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히 그렇다고 할거다. 결국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 고통 속에서 알게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강콘서트에 가면서 스무살 초반을 한강 시인과 함께했어서 그 콘서트에서 엄청 울었는데,
항상 내 작은 방에서 하루종일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림 말고 그렇게 몰두해서 무언가를 해본 게 낯설었는데,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다.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했고, 내가 가장 아플 때 살았던 곳이기도 했는데,
그곳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을 많이 보내주고 치유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 다시 생각해보니 욱씬욱씬 쑤시기도 했다. 나는 결국 누군가를 그리워해 보았던 사람이었다. 요즘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전남친들에게 갑자기 연락와서 집착과 욕망을 많이 겪어서 그게 너무 힘들기도 했는데, 결국 그 집착과 욕망과 그리움을 내려놓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하는 개인인 동시에 서로 함께 사랑해야하는 인간이기도 한 것 같다.
결국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드라마는 한순간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 기점에서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묘약이기도 하고, 평생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것이 집착없이 정말 큰 사랑의 형태라면 나라는 작은 자아를 내어줄 수 있을 만큼 큰 사랑을 경험할 수도 있는 고마운 매개이기도 하다.
사랑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진짜의 사랑은 위험을 감수한다. 본인을 내주었을 때 진짜 본인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사랑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무엇인 거 같다. 드러내거나 잡아두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