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들은 에너지의 형태로 응집되어 있고, 예민하다고 하는 건 그것들의 어떠한 설명을 스스로가 하지 않아도 줄곧 세상의 모든 것들을 투명하게 느낄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폭력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꽤나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그것을 다루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것이 어느정도의 좋은 능력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많은 ‘악’과 ‘나쁜 상황’은 때때로 한 인간에게 변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을 비극으로 생각하는 것과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억지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관점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려워했던 문장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그 글이 여전히 생각난다.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에 있는 글이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자신의 관점을 깨고, 자신의 좁은 세계와 예속관계에서 깨어 나오려면 우선 스스로의 아픈 곳을 봐야한다.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 그것이 악몽으로 돌아올 것 같지만 실은 반대다. 아픈 건 그 당시다. 아픈 건 그 상황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아파보고 나오면
그 나약했던 토대들이 한번에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꿈결같고 천국과도 같은 곳이 아니고, 또 다른 힘든 점들과 상황들은 언제나 있지만, 제일 많이 바뀌는 점은 스스로 인내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이다. 그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자유롭다는 건 어떠한 상황이 다 갖추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고,
사주라는 것과 운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족한 점과 좋은 점이 함께 있으니 스스로가 부족한 점을 고쳐나가고 좋은 점은 강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본인 뿐이니, 누군가의 판단에 휘둘리는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일 뿐이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있고, 그 사람을 통해 성장하기도 한다. 어쩌면 악연이라는 건 운명같은 것일 때도 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던 사람, 그리고 미래의 내가 결코 용서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순간에는, 그 사람에게 도리어 감사할 수도 있게 되는데,
완벽하게 포용할 수는 없어도 그 사람 덕분에 내가 무언가를 스스로 해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고,
에고라는 건 어느 사회에든 있는 것이고, 약한 자는 그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조금 더 강할 수 있는 자는 그것에 항상 도전하고 비판적인 사고로 바라본다. 그것이 바로 주체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주체적인 사고를 하려면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스스로가 감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좀 더 예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지녀야 한다.
누군가의 말이 그렇다고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맞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진술을 듣고 바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호기심이고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